사업관리실과 만난 사람들_2 (99회)
  제12장 KIST 시절

당시 우리나라에는 미국 및 유럽의 제도인 Stipend, 즉 「간접처우」라는 개념 자체가 대단히 미약할 때였다. 여비보조, 주택보조, 퇴직금, 휴가 및 가족수당 등 우리는 본봉만 따지며 나머지는 사치로 생각되었고, 모두 어려운데 혼자만 그런 것 챙기면 어떻게 하나, 애국심 발휘해서 처우 따지지 말고 조국에 좀 기여하면 어떠한가? 정도로 생각을 했을 때다. 당시 최 장관도 그런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던 걸로 본다. 그런데 박 박사는 처우문제를 당연히 기본적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미국식이다.

박 박사와 최 장관이 만나기만 하면 서로 피곤한 대화를 해 나갔다. 박 박사는 유창한 영어로 불만석인 공격을 하고, 최 장관은 질세라 강한 톤의 한국말로 역공을 하고, 항상 평행선을 긋는 광경을 자주 목격했다. 그리고 역시 외국 연구계에 오래 종사한 탓으로 박 박사는 지휘관의 경험이 부족한 면이 엿보였다. KID 기초를 잡는데 좀 지혜를 동원하고 공격적으로 운영하기를 최 장관은 원했으나 그런 면에서는 우리가 보기에는 박 박사가 좀 함량이 부족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했다.

박 박사는 2년여의 임기를 끝내고 한국을 떠났다. 그 후 화공(化工) 관계 프로젝트를 위해 가끔 한국에 출장을 오실 때 반드시 최고급 호텔인 장충동 「신라(新羅)」에 투숙하곤 했다. 그분의 취향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KIST 설립 후 40여년이 지난 지금, 박 박사와의 대화에서 얻은 것을 다시 상기하게 된다. 어느 한가한 시간 박 박사에게 내가 질문 한 가지를 던진 적이 있다. “원장님, KIST가 언제쯤 「제록스」같은 혁신적인 발명을 해서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요?” 했다. 은근히 10년 이내 라는 희망적인 대답을 기대하면서. 그런데 박 박사 왈, “30 years may be short!” 한다.

대단히 실망스러웠다. 그런데 KIST는 20년의 경험축적과 30년째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국제적인 인정을 받게 된다. 연구성과란 그렇게도 거양하기가 힘들고 어려운 것이다. 미국, 독일, 영국, 일본 등지에서 모여온 그 유능한 수많은 과학, 기술자들은 진군나팔을 분 지 30여년이 흘러서 그들의 업적이 비로소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물론, 수많은 국내전용연구기관의 사범 역할을 톡톡히 해냈지만 말이다.

세 번째의 만남은 New York 대학의 장건(張建) 박사이다. 장면 총리의 제씨(弟氏) 되는 분인데 NYU에서 기계공학교수로 재직하고 있었고, 한국인으로서는 상당히 알려진 기계공학 분야의 석학이었다. 오래간만에 해금된 장 박사는 KIST의 초빙교수로 1972년 초에 와 계셨다.

시내 호텔에 투숙하셨는데 출근 때 내가 모시고 나오면서 차 속에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신부(神父)가 되는 것이 가족의 염원이었으나 1930년대 독일 유학을 가면서 기계공학도가 되었다고 한다. 「카톨릭」장학금으로 공부를 한 관계로 유학생 중에는 비교적 여유가 있었으나, 2차 대전이 시작되면서 한참 나이에 얼마나 굶주렸는지 모른다고 했다.

학위를 끝내고 독일 연구소에 취직을 했는데 하루 두 끼를 감자와 삶은 무로 연명하는데 나중에는 폐질환이 생기면서 곧 죽게 되자 신부님의 도움으로 스위스로 탈출해서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유태인에 대해서는 가혹했으나 한국인은 당시 일본 국적으로 간주해서 동맹국의 일원으로 비교적 자유로웠다. 따라서 별 사찰은 없었으며, 언제나 「카톨릭」의 보호 하에 있었기 때문에 안전했다고 한다.

카톨릭은 초창기 「나치」가 집권하는데 일조를 했기 때문에 비교적 밀월이 계속되었고, 정부가 교회의 요구를 비교적 잘 들어준 모양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스위스에 이주한 장 박사는 신부님과 교회 일을 도우면서 소일하다 2차 대전의 종전을 스위스에서 맞았다고 한다.

독일에서 풀죽도 얻어먹기 힘들어 고생하다 영생중립국인 스위스에서 우유, 치즈를 마음껏 먹으니 지상낙원이 따로 없더라는 것이다. 독일이 1939년 폴란드를 점령하고 그 후 프랑스를 지배했을 때에는 식량난은 별로 느끼지 못했으나 1944년 말 독소(獨蘇)전선이 무너지면서 해방되던 45년 5월까지 극심한 식량난을 겪었다. 어느 벽촌의 광산지대에서는 가죽구두를 삶아 먹었다는 일 그리고 농촌에서는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양면전쟁을 치르던 독일은 태평양전쟁을 끌어가던 일본보다 훨씬 심각한 국민적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 장 박사가 계약기간을 끝내고 떠나면서 나에게 한 말, “김 실장, 한국의 장래는 밝습니다. 젊은 과학자들의 불타는 의지 그리고 해야겠다는 관료군의 투지를 나는 확인하고 떠납니다.”라는 말,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 과학원 박달조 원장(Dr. Joeseph Park)과 함께 / 1974년 신년인사에서

네 번째 만남은 「포항제철」초창기, 기술도입의 산파역을 담당했던 김철우(金鐵祐) 박사와의 짧은 만남이다. 그는 일본 오사카(大阪)의 빈한한 한국 가정에서 태어나 고학과 조총련 장학금으로 오사카 대학 금속기계공학을 전공한 분으로서, 최형섭 장관의 금속 분야와 같았다. 포항제철의 기술도입을 하는데 신일본제철(주)의 추천으로 김 박사가 오게 되었다. 모든 제철공장 도면과 기술 메뉴얼을 KIST에서 작업하여, 기술 도입의 일관성과 자료의 공유화를 시도한 첫 번째 국가 대형 「프로젝트」였다. 아주 강한 일본식 액센트를 구사했으나 모국어 사용에는 전혀 지장이 없고, 검소하고 말이 없는 분으로 호감이 가는 인물이었다.

나와는 KIST 도장(道場)에서 운동을 쭉 같이 했고, 둘 다 때로 일본말로 통화하는데 지장이 없었기에 비교적 편한 교우를 해 나갔다. 가족과 떨어져 오래 독신으로 나와 있어 동정도 가고 해서 가끔 술자리도 같이 했다. 그리고 나는 일 년여 만에 원자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교류가 잠시 끊어졌고, 아침 새벽 KIST 도장에서 「요가」운동 때 가끔 만나는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간첩 혐의로 정보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있으며, 김 박사와 자주 어울린 많은 사람들이 불려가 1주, 또 2주간의 혹독한 조사를 받고 나왔다고 한다. 그중 약 한달 간의 취조를 받고 나온 Mr. Lee는 그 일로 인해 완전히 초점을 잃은 사람이 되었다. 그는 중앙식당의 요리장으로서 술을 좋아하는 김 박사와 자주 어울려 술자리를 같이 한 것이 화근이었고, 김 박사의 간첩활동에 국내핵심으로 오해받은 것이다.

김 박사의 간첩혐의의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김 박사는 「오사카」 한인시장(韓人市場)의 아주 비천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생하다가 머리가 명석하여 일본 중부의 명문 오사카대학에 입학했다. 아버지는 조총련에 가입했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총련의 장학금으로 박사학위까지 마쳤다. 그런 김 박사를 북쪽에서 가만둘 리 없었다. 기술일꾼으로 부려먹으면서 이북에 두 번이나 입북했고, 기술영웅으로서 북쪽 훈장도 받은바 있었다. 이것은 총련의 일반적인 「시나리오」이다.

그런데 대일청구권(對日請求權) 자금으로 시행되는 거대한 「프로젝트」가 포항에 이루어지면서 김 박사는 제철기술 도입의 핵심적 두뇌로서 한국에 들어왔다. 본인은 그전에 했던 이북과의 교류에 관해서는 기술적인 문제이고, 사상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것으로 생각해서 입국 때에 그러한 과거를 전혀 언급함이 없이 들어왔고, 기술이전이 필요한 포항제철에만 매달려 왔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가 일본에서 우리 기관에 밀고를 한 것이다. 추측인즉 한국 국가기간사업의 핵심의 하나인 제철기술을 한국에 이전하는데 중심 역할을 하고 있는 김 박사가 괘씸했든지 아마도 조총련의 소행으로 당시 추측하고 있었다.

이렇게 KIST는 약 6개월간 간첩사건 소용돌이에서 고초를 겪어야 했고, 기술도입 일정에도 상당한 차질이 있었다. 조사 결과 의외로 국내 간첩활동 단서를 전혀 잡지 못했고, 김 박사는 개인적인 과거의 사상적 배경으로 간첩미수 또는 불온인물로 분류되어 반공법으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된다. 판결 후 약 8개월 만에 사상과 기술을 별개로 하고 상부의 양해가 이루어져 해오던 일을 계속하게 되었다.

나에게까지 조사의 손길이 뻗치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보통 사상관계 조사를 할 때에는 접촉했던 모든 사람을 소화하기 마련인데 말이다.

여하튼 우여곡절 끝에 포항제철은 68년부터 시작하여 73년 8월, 예정대로 103만 톤 생산의 거대한 제철소로 탄생하였으며, 김 박사의 조사 복역 중 대리역(代理役)으로 활동했던 이봉진(李奉珍) 씨의 역할이 지대했다.

 
  사업관리실과 만난 사람들_1 (98회)
  KIST 여적(余滴)과 원자력연구소로의 이적 (10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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