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ST에는 초창기에 소장 아래 행정부소장과 연구부소장이 있고 2개의 실(室)이 있었는데, 행정 관리실은 주로 인사와 기금관리를 담당했고, 총무과와 인사과 그리고 회계과가 있었으며, 연구기관에서 오래 근무했으며 KIST 창립에 참여했던 안병주(安秉柱) 씨가 실장을 맡고 있었다. 36억에 가까운 당시로선 막대한 출연기금을 운영하는 매우 중요한 자리였다.
내가 부임하면서 행정부소장 자리는 폐지되고 2개 실(室)은 소장 직속으로 있었다. 그리고 행정부소장으로 있던 신응균(申應均) 전 대사(前 大使)는 감사(監事)의 자리로 옮겼다.
사업관리실에도 3개과가 있는데 국제협력과, 홍보과 그리고 시설과였다. 국제협력과장은 나의 통역장교 동기생인 최기상(崔起相) 씨였고, 홍보과장은 작가 출신 한분이 있었으며, 시설과장은 KIST 건설 단계에서 감독으로 나왔던 공병대대장 장화진(張華鎭) 중령이 제대하고 나서 시설을 맡고 있었다.
장 과장은 서울공대 기계공학과 출신으로 6.25 사변 때 입대해서 중령까지 진급한 분인데 매우 유능하고 기백이 있는 분이었다. 그리고 덕수 장씨의 후예인데 기골이 장대할 뿐만 아니라 용모가 꼭 「아랍」인 같아 나와는 많은 장난말을 주고받으며 연배는 4~5세 위였지만 친하게 지냈다. 연구요원들과 연구시설 또는 「아파트」문제로 다투고 돌아오면 씩씩거리면서 “실장님, 새까만 친구들이 외국 가서 박사학위 하나 했다고 건방을 떠는데 못 봐 주겠어요!” 한다. 그러면 나는 “장형, 소화제는 판타제~~” 리듬을 걸어 선창하면 어느덧 합창으로 끝내고 같이 파안대소를 하곤 했다. 당시 연구실장들은 거의 100% 서울문리대 또는 공대 출신들이었다.
초창기 KIST의 기초를 세우고 장관으로 부임한 최 장관의 후임으로 연구부소장이었던 심문택(沈汶澤) 박사가 약 6개월 정도 소장으로 있다가 국방과학연구소(ADD) 소장으로 떠났으며 후임 소장으로 연구부장으로 있던 한상준(韓相俊) 박사(후에 한양대학교 총장 역임)가 취임했다.
한 박사는 일본 경도(京都)의 3고(高) 출신으로 수재였고 대단한 호인이었다. 언제나 미소를 지으며 반가이 맞이하는 매우 인성이 좋은 분이었다. 전공은 화학이고 미국 화학계열의 명문 「유타」대학에서 학위를 했고, 한국인 석학 이태규(李泰圭) 박사의 수제자였다.
최 박사가 장관이 됨으로서 KIST와 과학기술처는 긴밀해졌고 최 장관은 KIST의 후견인으로서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주요한 결정에는 언제나 최 박사의 참여가 있었고 그의 KIST 연구요원들에 대한 도덕교육 훈화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행정요원들에 대한 월권을 견제하기 위한 말씀도 귀가 아프도록 계속되었다. 어느 날 도서실에서 「효과적인 연구지원」이라는 미국의 한 학자가 쓴 책을 읽어봤다. 연구소의 행정은 Pixy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 골자였는데, 동화책에 나오는 ‘신데렐라’ 편에 ‘신데렐라’가 계모의 학대에 기진맥진 그 많은 설거지를 하다가 지쳐 잠깐 상머리에 기대 졸고 있을 때 Pixy라는 요정 일꾼이 나타나 설거지를 말끔하게 해놓고 바람같이 사라지는 장면이 나온다. 즉 연구를 위한 행정지원은 이와 같이 소리 없이 뒤에서 이루어지고 절대 나타나지 않는 Pixy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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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IST 사업관리실 간부직원 일동과 (19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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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간부간담회에서 최 장관이 예의 철학을 일갈하는 자리에서 내가 Pixy 이론을 소개하면서 우리 행정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요지의 말을 했던 적이 있다. 이에 최 장관이 미안했던지 “너무 그럴 필요는 없고....” 하신다. 여하튼 Pixy는 한동안 우리 행정의 우스개 모토가 되었다.
KIST에서 근무하던 1년여 동안 많은 좋은 분들을 만났다.
첫째 신응균(申應均) 감사(監事), 일본 육사(陸士) 출신으로 일본군 포병대위로 참전한 그는 8.15 종전을 모른 채 오키나와 동굴 속에서 3개월을 더 버티다 미군에 투항한 희귀한 경력을 가진 분이었다. 투항 후 석방된 몸으로 동경 육군성으로 돌아가 생환했다고 신고했더니, 대위에서 소좌로 일계급 특진되어 있었고 전사자로 분류되어 있었다고 한다.
1946년 귀국해 보니 국방경비대의 모태인 군사영어학교는 이미 진행되어 있었고, 가로 늦게 특기로 재임관 되어 중장에 이르고, 국방부차관으로 있다가 서독 대사를 역임했다.
독서와 미식(美食)이 취미인 그분은 음악을 비롯한 무대예술 그리고 세계의 맥주와 ‘와인’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상식이 풍부해서 대화를 하면 할수록 맛이 나는 분이었다. 19세기 귀족시대의 외교관으로서는 안성맞춤이었고, 구라파 외교계 어디에 내놔도 돋보이는 분이었다.
아주 자상하고 치밀한 분이어서 담배를 줄이는 방편의 하나로서 한 대를 피우면 몇 일 몇 시에 피웠는지를 담뱃갑에 꼬박꼬박 기록을 하면서 줄여가고 있었다. 하루 다섯 개비로까지 줄이는 기염을 토하며 나에게 자랑까지 하시곤 했다.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많으나 실천력에는 문제가 있었다. 특히 부탁을 거절 못하는 성미에다가 장악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박 대통령도 걱정을 해왔을 정도였다. 그러나 대외적인 상징력은 좋은 분이어서 부(副) 자가 붙은 참모 자리에는 적임이었고 인화(人和)를 조성하는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신(申) 장군 내외 KIST 설립에 공을 세운 당시 과기처 연구조정관으로 있었던 전상근(全相根) 씨 내외, 그리고 우리 내외는 주기적으로 만나 즐거운 회식을 즐기곤 했다.
두 번째로 기억이 나는 분은 KID(KAIST) 원장으로 부임한 하와이 사탕수수밭 이민 2세인 박달조(朴達祚) 박사이다. 한국말은 좀 어색했지만 영어 담소는 아주 유창해서 그분의 강의를 듣고 있으면 작은 시내의 여울 같은 부드러움을 느끼곤 했다. 미국 Du Pond의 선임연구요원으로 30여년을 종사하고 대학 강의를 오래 한 분으로 미국 특허만 20여개를 보유한 당대 화공학계의 거물이었다.
당시 KIST를 위시해서 국내 연구계에서 박달조 씨만큼 유창하게 우리나라 과학기술계의 현황을 적절하게 영어로 설명하고 감명을 줄만한 화술의 능력자는 없었다고 본다. 가끔 KIST에서 국내 외교관 또는 외교관 부인을 초대할 때는 내가 나서서 박 박사를 초청해 Introductory Speech를 부탁하곤 했는데 모두 좋아들 했다.
다만 문제는 미국 산업기술연구를 평생 해오던 분이고 원가(原價) 등 돈에 대한 집착이 대단히 강했다고 본다. 그렇다고 해서 예산을 유용하거나 비리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당초 최 장관과 약속한 처우가 미진했던지 나를 만나면 호소하다시피 불평, 불만을 토로하시곤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