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인 최초로 백인의 아성에 도전 (13회)
  제3장 IOC 위원장에 도전

2001년 7월 13일부터 16일까지 열린 제112차 모스크바 IOC 총회에는 전 세계 스포츠 가족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1980년 IOC 위원장에 피선되어 IOC헌장을 몇 번씩 바꾸고 21년간 세계 스포츠를 관장했던 스페인 출신 사마란치(Samaranch)가 권좌에서 물러나고 새로운 IOC 위원장이 선출되기 때문이었다.

물론 IOC 위원장 선거 자체만 해도 세계의 이목을 모을 이슈임에 분명하지만 제112차 IOC 총회는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IOC 창설 105년의 역사에 있어서 처음으로 백인이 아닌 유색인이 IOC 위원장에 도전하고 나선 것이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내가 IOC 위원장에 출사표를 던진 것만 해도 IOC 내의 혁명이며 유색인의 일대 쾌거라 평했고 전 세계 언론도 최초의 유색인 IOC 위원장에 유력 인사로 나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IOC 위원장은 백인의 전유물이었다. IOC 위원장은 물론 후보자조차도 유색인은 한 명도 없었다. 2002년 현재까지도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유색 IOC 위원은 향후 몇십 년 내에 국제 스포츠계에 나만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은 나오기 힘들 것이라며, IOC 위원장 선거에 출마할 것을 적극 권유했다.

나는 서울올림픽 준비가 한창이던 1986년 10월에 IOC 위원에 선출되었다. 처음부터 IOC 위원장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IOC와 올림픽 발전을 위해서 또 한국스포츠 그리고 태권도 발전을 위해 열심히 뛰었고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이런 나의 노력은 IOC 역사상 최고 빠른 고속 성장을 가져다주었다. 1년 10개월 만에 1988년 9월 서울 IOC총회에서 IOC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5년 10개월 만인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에는 일본의 이가야(Igaya) 집행위원을 54대 28로 물리치고 IOC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사마란치 IOC 위원장도 IOC 위원이 된지 2년 만에 IOC 집행위원에 도전하였으나 떨어지고 그 후 2년만에야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사마란치의 앙숙인 IOC 전 사무총장 모니크 베를리유(Monique Berloux)도 IOC 역사상 가장 빨리 집행위원과 부위원장이 되었다며 축하를 해주었다.

나는 세계 언론으로부터 자주 1990년대 가장 영향력 있는 세계 스포츠계 인사 중 2위로 평가를 받았고, 그 힘이 세계 스포츠의 최고 기구인 IOC를 이끌 능력으로 이어진 것이다.

서방 언론은 이미 1990년대 중반부터 포스트 사마란치로 나를 손꼽으면서 IOC 역사가 뒤바뀔 것을 조심스레 점치기 시작했다. 국내 언론에서도 “김 회장의 도전은 오륜기가 의미하는 모든 인류를 단합하게 하고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것이며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실은 1997년 사마란치의 세 번째 임기가 끝나고 위원장 선거가 있을 예정이었다. 이 때 로게는 IOC위원이 된지 얼마 안 돼 일천했다. 집행위원도 되기 전이다. 파운드와 나의 대결이 예상되었고 제3국의 지지를 많이 받고 있는 내가 유리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솔트레이크 사건도 터지기 전이라 나를 지지하던 아프리카와 남미 IOC위원들이 그대로 있을 때다. 갑자기 사마란치가 보냈다고 음바예(M'baye) 위원이 서울로 찾아왔다. 사마란치가 한 번 더 IOC위원장을 하려 하니 이번에 양보해주면 2001년 나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하고 그러면 아무 문제 없을 거라는 사마란치의 간청이 있었단 이야기였다. 양보를 안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갖은 박해가 이어졌다. 그런 약속을 믿어서는 안 되는 것 같다. 나는 결국 타이밍을 놓친 것이다.

2001년 다시 위원장 선거 시기가 됐을 때, 나는 섣불리 IOC 위원장 출마를 선언하지 않았다. IOC 위원장의 대임을 맡기 위한 나의 능력을 점검하고, IOC 위원장이 되었을 경우 IOC와 세계 스포츠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충분히 검토를 하기 위해서였다.

▲ 2001년 IOC위원장 선거 출마 기지회견(모나코)

IOC 위원장은 권력을 휘두르거나 보상을 받는 자리가 아니다. IOC 위원장은 세계 스포츠 발전을 위해서 봉사하고 헌신하는 자리라는 것이 내 철학이었다. 2001년 4월 12일 후보 마감일 전까지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고, 나는 내 나름대로 IOC에 대한 나의 철학을 바탕으로 공약을 정리했다. 그러나 2001년 총회에서 사마란치는 공약 발표를 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갑자기 공약 발표를 금지시킨 것이다.

4월 3일 나는 국제경기연맹총연합회(GAISF) 본부가 있는 몬테카를로(Monte Carlo)에서 제8대 IOC 위원장 후보 출마를 공식으로 선언했다. 벨기에 왕자인 메로드 IOC위원, 프랑스의 흑인 태권도 메달리스트 파스칼(Pascual)이 나를 만나러 왔다. 그날 나는 AP, AFP, 로이터 등 세계 유력 통신사와 영국의 데일리 텔레그래프, 독일의 스포츠 인테른 등 세계 각국에서 모인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IOC 위원장이 된다면 먼저 지나친 상업주의로 훼손된 올림피즘을 복귀하는 데 앞장설 것이다. 아울러 올림픽의 근간인 청소년 교육에 주력하고 평화 추구라는 올림픽 이념을 최대한 살리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5개 대륙에서 골고루 지지를 받고 있는 보편성 있는 지도자, 그리고 역량이 인정된 지도자가 필요할 것이며 그래서 출마한 것이다.”

그때 한 외신 기자가 질문했다. “김 회장께서는 개혁보다는 보수 성향이 강하다는 지적인데 이제 IOC도 개혁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나는 “내가 생각하는 개혁은 하루아침에 모든 제도를 바꾸고 사람을 갈아치우는 게 개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개혁이란 중단되지 않고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현대화하고 개선해 가는 것이며, 나는 IOC 부위원장, IOC텔레비전·라디오 분과위원회 위원장, IOC 위원, 국제경기연맹총연합(GAISF) 회장, 세계태권도연맹(WTF) 총재,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의 일을 맡으면서 이런 일들은 계속 해 오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공식 출마 선언이 있자 내외신 기자들은 후보자들의 성향을 분석하고 가능성에 대해 점치기 시작했다. 신문이나 국제적인 통신사들은 자크 로게, 팔 슈미트, 딕 파운드, 애니타 데프란츠, 그리고 나까지 5명의 후보 중 결국은 로게와 나의 대결이라고 분석하면서 내가 37명의 IOC 위원을 갖고 있는 아시아, 아프리카 표가 확고하고 미주 및 유럽의 일부 표를 획득할 경우 당선이 가장 유력한 것으로 분석했다. 그 분석에 따르면 내가 40~42표, 로게가 37~38표, 파운드가 18~20표 정도를 획득한다는 것이다. 이 분석은 실제로 내가 생각했던 것과 비슷하며 나도 그렇게 확신했다. 그러나 선거와 운동경가는 뚜껑 열어 보아야 한다는 철칙은 잊지 않았다.

그리고 출마를 공식 선언하면서부터 내가 우려했던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태권도 올림픽 정식종목 포석을 깐 모스크바 올림픽 (12회)
  이중 인격의 사마란치 (1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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