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여 동안의 원장생활은 문자 그대로 분주했다.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다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였다. 500병상 규모의 병원이 필요로 하는 직원은 1천명인데 반해 1천 병상의 병원은 그 3배의 인원을 필요로 한다는 경험도 겪었다. 직원의 수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증가하는 것이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협소한 공간에 수많은 사람이 들끓고 있으니 짜증이 날 만도 하다. 그럴수록 분위기를 명랑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신조였다. 그래서 착상한 것이 '스마일 캠페인'이었다. 이왕이면 웃으면서 일하자는 운동이다. 이러한 운동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계속적이어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더 설명할 나위가 없다. 이 캠페인은 고창순(高昌舜) 부원장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상당한 성과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병원장 시절에는 웃지 못 할 뒷이야기도 많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유기춘(柳基春) 전 문교부장관과 관련된 이야기다. 유(柳)박사는 전남대(全南大) 총장에서 문교부장관으로 임명된 분인데 장관 재임 중에 사무실에서 쓰러져 서울대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결국 식물인간이 되고 말았다.
그는 호탕한 성격의 학자였으며 추진력이 뛰어난 행정가이기도 했다. 대통령에게 업무보고를 하는 과정에서 둔마(鈍馬) 운운한 부분이 언론인들에게 꼬집히기도 했지만 그의 표현이 다소 와전되었다는 것이 세론이었다.
그의 입원비는 청와대에서 부담하였다. 무려 5년여나 입원생활을 한 것이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원장인 나는 가끔 그의 병실을 방문했다. 아무 의식 없이 누워있는 그의 모습이 처량하기만 했다. 의식 없이 오랫동안 누워 있으니 가족의 간호에도 어려움이 많은 것은 짐작할 만하다.
89년 크리스마스가 며칠 남지 않은 어느 날, 당시 문교부장관이던 김옥길(金玉吉) 박사로부터 출두하라는 전갈을 받았다. 김(金)장관이 이화여자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여성지도자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장관실로 부른 사연은 이러했다.
서울대학교 병원이 나라의 뒷받침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개인이 무제한으로 무료 입원한다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이다. 유(柳)장관과는 면식이 없는 처지이지만 크리스마스도 가까워지고 해서 인사를 나눌 겸 부인을 만난 일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같은 이야기를 하고 대책을 강구해 보라고 권했으니 원장의 입장에서 잘 처리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지극히 합리적인 지시였다. 나는 지금도 이러한 지시를 한 김(金)장관에게 경의를 표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그런데 그 당시 나의 입장은 아주 난처했다. 출두하기 전 전날 유(柳)장관 부인이 원장실로 찾아와, 부디 무료입원이 계속되도록 해달라는 애처로운 당부를 하였고 나는 선처하도록 하겠다고 언약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 유(柳)장관의 집안 사정은 아드님의 자동차 사고 등으로 극도로 좋지 못했다는 것을 전문(傳聞)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처를 언약했던 것이다.
뒤처리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에 빠졌다. 당시 청와대는 텅 비어있는 상태였고 권숙정(權肅正) 비서관 한 분이 지키고 있는 정도였다. 별로 기대는 안했지만 권(權)비서관을 만나서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하면서도 노력은 해보겠다는 성의를 보였다. 박(朴)대통령이 시해된 후의 일이니까 누구도 엄두를 낼 수 없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며칠 후 대단히 반가운 소식이 날아왔다. 청와대에서 해결할 수 있게 조치되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조치가 마련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자세한 것을 알지 못했지만 어쨌든 권(權)비서관 덕분이었다. 권(權)비서관은 후에 문교부 기획관리실장, 국립중앙도서관장, 천안(天安)공업전문대학장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
|
| ▲서울대병원장 시절에 전국 국립의대학장, 병원장 세미나를 개최했다 / 앞줄 왼쪽 두번째 A.M. Rankin WHO 주한대표, 네번째 신동훈 의대학장, 고병익 서울대총장, 나, 박일재 문교부대학국장, 홍창의 서울대병원부원장 (1980. 4. 3.) |
|
.
관리동(管理棟)의 건축이 시급하다는 여론이 높았다. 많은 사회 저명인사들이 원장실을 찾아주었다. 하루는 장덕진(張德鎭)씨가 내방하였다. 그는 언제부터 원장실을 사용하느냐고 묻는다. 비서실을 임시로 원장실로 쓰고 있다고 착각한 것이다. 당시의 원장실은 현재의 제 1부원장실이었는데, 서울대학교병원 원장실로는 걸맞지 않게 협소하였다. 그는 행정심리학(行政心理學)상 적절치 못하다고 설명하기도 하였다. 공간에 여유가 있어야 생각하고 구상하는 데도 여유가 생기는 법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집무실 넓이에 대해서는 나라에 따라, 또는 직장에 따라 관념이 다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미국식 관념으로는 집무실이 넓지 않다. 대학교수실 등이 이러한 사정을 잘 말해 주고 있다. 기관장 집무실이 엄청나게 넓은 경우가 우리 주변에는 많지만 당시의 서울대병원장실의 규모는 지나치게 좁았던 것도 사실이다. 원장실도 문제였지만, 행정부서를 수용할 수 있는 건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행정동의 건축을 서두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병원 건축과정에서 수 개의 건설회사가 도산하고 말았으니 업자선정이 중요한 과제로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신두영(申斗泳) 감사원장을 방문했다.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고 굵직한 업자를 선정해야겠는데 협조해달라고 부탁했다. 말하기 좋아하는 신(申)원장은 여러 가지 예를 들면서 자기 입장을 설명한다. 자신은 총무처차관 등 여러 직책을 거치면서 약 10만평의 건물을 세웠는데 그 결과로 얻은 결론은 충분한 시간, 충분한 예산, 그리고 철저한 공사감독이 전부라고 하며 이 세 가지 조건만 충족된다면 잘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규정에 맞지 않는 업자선정을 단속하는 일이 자신의 책무인데 자기에게 부정을 하라고 하니 어떻게 답변할 수 있겠는가 하고 되묻는다. 어려운 입장에 계신 줄 알면서도 찾아온 것이니 이해해 달라고 거듭 부탁했다.
어쨌든 관리동은 이름이 있는 건축회사에서 맡게 되었다. 지금도 병원장실을 방문하면 그때 일이 회상된다. 신(申)감사원장은 대학병원에 대해서 차원 높은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대학병원이 돈벌이를 전제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 병실의 일부는 언제나 비어있어야 한다는 것 등이 그 내용이었다. 다른 병원에서 치료할 수 없는 환자를 치료하는 곳이 대학병원이며 언제 이러한 환자가 올는지 모르는 일이니 병상의 일부를 비워놓고 항시 대비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의학교육자의 입장에서는 우러러 볼만한 견해임에 틀림없지만 현실은 이 원리에 대하여 지극히 냉담했다.
의료보험제도가 확대 실시됨에 따라서 대학병원을 비롯한 종합병원은 초만원 상태를 이루었으며 병실 얻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힘들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특히 89년에는 도시자영자(都市自營者)까지 대상이 되어 전 국민 의료보험체제가 시작되었는데 그 후부터 병실난(病室難)은 더욱 가중되었다. 그러니 일부 병실을 비워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의료전달체계(醫療傳達體系)의 확립 등 여러 제도가 강구되었지만 병실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여러 곳에서 병원 신축이나 증축이 시작된 데이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훨씬 전에 고인이 되셨지만 신(申)감사원장의 말씀이 가끔 떠오른다.
서울대학교병원 건물이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특지(特志)로 세워졌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병원 12층 한 코너에는 대통령 전용 병실도 있다. 또한 대통령 내외분 전용의자도 준비되어 있었다. 건물도 완성되고 하여 대통령께서 내방하실 예정이라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런데 내방하시기로 되어있던 며칠 전인 79년 10월 26일 대통령 시해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나는 시해사건이 발생한 것을 알지 못하였다. 비상소집을 받고 병원에 와보니 영안실 방을 다섯 개 준비하라는 지시다. 무엇 때문에 영안실 방이 필요한지 처음에는 알 길이 없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대통령의 시신을 모시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대기하고 있으려니까 앰뷸런스가 몇 대 들이닥쳤다. 제일 먼저 운구된 것이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의 시신이었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시신들이 몇 구(具) 따랐다. 많은 문상객들이 줄을 이었다. 누구도 정확하게 설명해 주는 분은 없었다. 궁정동(宮井洞) 사건의 전모는 훨씬 후에야 알게 되었다.
13개월 동안 원장직을 맡은데 이어 나는 80년 6월 30일 서울대학교 총장으로 임명되었다. 2주 후인 7월 15일에는 관리동 기공식이 거행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