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5월 28일 서울대학교(大學校) 병원장(病院長) 임명장을 받았다. 정확하게는 병원장서리(病院長署理)이다. 교수직을 계속 보유하기 위하여 이러한 직함을 택하였다. 서울대학교 병원이 특수법인으로 된 후 김홍기(金弘基) 원장의 뒤를 이어 제 2대 원장이 된 것이다.
취임한지 며칠 후 건물 밖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용을 알아봤더니 건축회사에서 하청을 주었는데 임금이 지불되지 않아, 인부들이 소란을 피운다는 이야기였다. 서울대학교 병원 신축공사로 4개의 건축회사가 도산했다는 소문은 듣고 있던 처지여서 비교적 냉담하게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원장도 바뀌고 했으니 빨리 밀린 임금을 지불해 달라는 요구였다. 당연한 요구임에 틀림없었다.
당시 나는 겨우 병원의 간부진용을 갖추고 새 출발을 할 무렵이었다. 진료 제1부원장에 홍창의(洪彰義) 교수를, 관리부장에 서울대학교 사무총장을 역임한 김도연(金道淵)씨를, 기획관리실장에 신영수(申英秀) 조교수를 신규로 임명하고, 전부터 진료 제2부원장이던 고창순(高昌舜) 교수, 진료 제3부원장 즉 치과진료부원장인 장완식(張完植) 교수, 연구부장이던 노관택(盧寬澤) 교수와 박용진(朴容鎭) 감사로 간부진용을 구성했었다.
홍창의(洪彰義) 부원장은 일본 경도대학(京都大學)에서 공부하다가 해방 후 나와 함께하게 된 동기생이며 소아과 분야의 권위자이다. 내가 서울대학교 총장으로 임명되자 후임으로 그를 추천했다. 고창순(高昌舜) 부원장은 궂은일을 해결하는데 대단한 능력이 있었다. 핵 의학의 권위자이며, 대인관계가 뛰어난 학자요, 행정가이다. 그런 탓에 그는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주치의를 지내기도 했다.
노관택(盧寬澤) 교수는 원장으로서 많은 공적을 세우고 1993년 5월에 임기만료로 퇴임한 이비인후과 교수이다. 신영수(申英秀) 교수는 Yale대학에서 보건경제학을 전공한 보기 드문 의료행정가이다. 특히 병원행정에서 독보적 존재를 과시하고 있다. 신(申)교수는 재차 기획관리실장직을 맡기도 하였고, 의과대학에 의료관리학교실을 신설하여 주임교수로서 일하는 한편, 서울대학교 병원연구소장으로도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이것을 발전시켜 한국의료관리연구원(韓國醫療管理硏究院)으로 발족시켜 초대 원장직을 수행하고 있는 중이다.
관리부 원장에게 대책을 강구해 보라고 했더니 방치해 두면 그만큼 병원이 손해를 입게 되니 하루빨리 문교부로부터 공사대금을 수령하여 업자에게 넘겨주는 것이 상책이라고 한다. 즉시 박찬현(朴瓚鉉) 문교부장관을 방문했다. 박(朴)장관은 나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즉각6억 원을 마련토록 지시했다. 나는 난생 처음 거액의 수표를 만져 보았다. 이미 사정이 파악되어 문교부에서는 대책을 마련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었다. 어쨌든 신임 원장으로서는 대단한 선물을 받은 셈이다.
병원에 돌아와서 수표를 관리부 원장에 전해 주고 빨리 사태수습을 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생겼다. 내 경우와 같이 이 분야에 관한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는 신기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공사대금을 건축회사가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금 관계로 그렇다는 이야기다. 그 당시에는 자세한 설명을 들었던 관계로 이해가 가는 듯 했지만 지금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의 상식으로는 납득이 안 간다. 김(金) 관리부 원장은 하루라도 빨리 대금을 건축회사에 주어야 병원이 책임을 면할 수 있다면서 빈번하게 세무서와 접촉했다. 그 결과 수 일 후에 수표를 건축회사에 줄 수 있었다.
|
|
| ▲ 서울대학교병원 병원장 이췸식에서 / 김기홍 초대 원장에 이어 나는 2대 원장에 취임했다 (1979. 6. 4.) |
|
병원장으로서 우선 닥친 일이 병동문제였다. 신축건물인 만큼 병동문제가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7월에는 수술실 16실을 전부 가동되게 했고 산부인과, 정형외과, 내과, 일반외과, 정신과, 안과 등의 순으로 열었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부서가 개설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는 의공학과(醫工學科)와 소아정신과(小兒精神科)를 들 수 있다. 전자는 당시 조교수이던 민병구(閔丙九) 박사가 주동하였는데, 그 후 장족의 발전을 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선구자적 역할을 해왔다. 시대의 흐름이 의공학을 필요로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며 많은 의과대학이나 병원에서 부러워했다.
후자는 의대졸업 후 미국에서 연구하고 미네소타대학 등에서 교편을 잡다가 귀국한 홍강의(洪剛義) 박사가 담당하였는데, 역시 이 분야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이외에 홍창의(洪彰義) 제1부원장의 주도로 가정의학과(家庭醫學科)가 탄생한 것도 특기할 만 하다. 또한, 내과외래에 '알러지 특수클리닉'이 개설되고 임상검사과에 정도관리실(精度管理室)이 마련되는가 하면, 산부인과에는 국내 최초로 불임시술복원 센터가 신설되고 이비인후과에 '청력 및 언어장애 복지센터'가 개설되는 등 첨단 분야에 중점을 두었다.
병원 운영을 개선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하였다. 먼저 병원진료 안내를 위한 VTR 시스템을 환자 대기실에 마련하고 외래약국에 투약번호판을 설치하여 외래환자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또한 병원 전체 교수 간담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도록 하였다. 이 간담회는 내과계와 외과계로 나누어서 열렸으며 교수들로 하여금 병원운영 전반에 관하여 기탄없는 의견을 교환하도록 하였다. 컴퓨터 시스템에 대하여 힘을 기울인 것은 물론이다. 한편으로는 과진료부 의무기록실을 중앙화해서 의무기록을 과학적으로 관리하도록 하였다.
의뢰진료제도(依賴診療制度)가 실시된 것도, 야간응급환자 신고센터 운영이 시작된 것도 재임 중의 일이었는데, 이들은 끝이 없는 과제임에 틀림없다. 그런가 하면 소아과 간호사의 복장을 변경한 것도 이때였다. 즉, 흰 바탕에 붉은 줄을 넣은 상의를 착용케 하여 아동심리학적으로 효과를 얻도록 하였다.
1980년 5월 23일에는 부설 병원연구소(病院硏究所)의 설립이 의결되었고, 1주일 후에 시계탑 건물 안에 설치되었다. 이 연구소는 그 후 병원정책이나 병원행정분야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고 세계보건기구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전국 국립의대 학장과 병원장을 대상으로 하는 세미나를 개최하여 서울대학교 병원의 위상을 굳히기도 했다.
의사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라는 명제는 영원한 것이며, 이를 위한 노력도 병원장이 해야 할 일의 하나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선배와의 대화시간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제일 먼저 이 시간을 맡아주신 분이 윤일선(尹日善) 명예교수였다.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원고 없이 연도와 날짜를 기억하고 계셨던 선생에게 새삼 경의를 표하기도 하였다. 선생의 말씀은 젊은 후학자들에게 많은 자극과 감명을 주었다.
김두종(金斗鐘) 선생의 구수한 회고담도 잊히지 않는다. 특히 좌우익 대립이 심각했던 때에 원장직을 맡으셨던 선생의 경험담 중에는 처음으로 듣는 새로운 에피소드가 소개되어 흥미진진하기도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