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임시 훈련소에 입대 (6회)

그는 자기 아들을 불러 남쪽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도록 지시했다. 큰 길은 위험한 듯해서 산 사이의 오솔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도중에 도주하는 북한군들과 마주치기도 했으나 별 문제는 없었다.

그러다가 길에서 보위부대원들의 검문을 받게 되었다. 모두 북쪽으로 도주하기 바쁜데 남쪽으로 내려가는 우리들을 보고 그들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동무들 어디 가는 거요?” 하면서 총부리를 세웠다. 나는 “우리들은 특수임무를 띠고 적의 후방으로 가는 길이다. 방해하지 말라.”고 고압적으로 대답은 했지만, 그때는 정말로 위험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쪽도 쫓기는 몸이었기에 아무 탈 없이 그 자리를 모면할 수 있었다.

만약 그때 우리가 탈출한 것이 탄로 났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평양의 동쪽에서 출발하여 남쪽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던 것 같은데, 소총사격소리가 들리기에 아군이 가까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옆을 보니 능선에 배치된 인민군도 볼 수가 있었다.

약 1.5킬로미터 아래로 보이는 국도에는 아군이 있을 것 같았고, 그 와중에서 만일 전투가 벌어졌을 때 우물쭈물 하다가는 큰일 날 것 같아서 서둘러 길을 따라 내려가기로 결심했다. 인민군이 우리에게 사격을 하면 그들의 위치가 노출되어 국군으로부터 공격을 받기 때문에 사격은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되었지만, 등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참으로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국도에 도착하여 국군 이동행렬을 만나자 나는 의무대(醫務隊)를 찾았다. 다행히 아주 가까운 거리에 제1사단 연대 의무중대 본부가 있었으며, 그곳에서 의무중대장인 최낙연 소령을 만나게 되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반갑게 맞아주면서 부상자 치료에 협조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평양까지 같이 갈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최 대장이 의사로서의 직업적 우정과 인정에 감사할 따름이었으며, 영원히 잊지 못할 고마운 분으로 나의 기억에 남게 되었다. 한국군과 미군 중 어느 쪽이 먼저 평양에 입성하느냐 하는 경쟁 속에 빠른 진격이 이어졌고, 다음날 1사단 1연대 소속으로 나도 평양에 입성했는데, 그때 평양 시민들의 환호와 거리의 모습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평양시에서의 첫날밤에 최 대장의 숙소에서 축하만찬이 있었는데, 군의관들과 함께 우리들도 초대되어서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최 대장은 우리들에게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도와달라고 당부했지만 서울에 있는 가족의 생사도 모르고 해서 빨리 귀가해야겠다고 말했더니 선뜻 이해해주었다.

나는 최 대장이 발부한 증명서 한 장을 가지고 도보로 서울까지 오게 되었다. 지나가는 군용차가 많았지만 정세가 불안하여 민간인을 승차시킬 수 없다기에 하는 수없이 3일 동안 무전여행과 다름없는 상태로 여름옷을 입은 채 걸어서 중화, 황주, 사리원을 지나 개성까지 도착했다. 어떤 사람들은 잘못되어 미군에게 포로로 잡혀가기도 했다는데, 나는 무사했으니 참으로 다행이었다.

▲ 이승만 대통령의 평양입성 환영대회 (1950. 10.19)

개성에 도착해서 서울까지 가는 차편을 구하기 위해 돌아다니는데 마침 서울대병원에 근무하던 간호사가 간호장교가 되어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우리를 알아보고 태워주어서 홍제동 고개까지 편하게 올수 있었다. 그곳에서 후암동 집까지 걸어왔는데, 내 모양도 초라했지만 서울의 거리 역시 북한군의 만행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황폐화되어 있었다.

불안한 예감을 가지고 집에 들어서니 온 집안은 울음바다가 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인민보위부에 납치되어 가신 후 소식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집안의 기둥이 되었고, 아버지를 끝없이 기다리면서 수십 년의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서울대학교 병원 외과에 다시 근무하기 시작했고, 간단한 수술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많은 교수, 특히 외과 과장이었던 김시창 교수가 납북된 후 소식이 없어 매우 침울한 분위기였다.

선배들의 따뜻한 지도아래 외과학을 전공하게 되어 젊은 의사로서 의욕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나, 이 즐거움도 오래가지 못했다. 참으로 전쟁은 비참한 것이었다. 특히 완전한 승리를 이끌어내지 못한 전쟁은 비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다시 악화되어 대학병원에도 후퇴지시가 내려지자 가족들은 대구로 피난을 떠났고, 나는 대학병원 팀의 이동행렬에 동참하게 되었다.

12월 말은 대단히 추웠다. 우리는 그 당시 병원에서 가장 귀중하게 취급되었던 현미경 한 대와 이불을 짋어지고 밤길을 걸어서 용산역에 도착, 열챠 편으로 인천으로 가서, 거기서 미군이 징발한 일본선적의 배를 타고 다음날 아침에 부산에 도착했다.

서울대학 병원 직원 대부분이 함께 피난길에 올라 부산항에 도착했지만 장래가 불투명하고 고난의 생활이 시작되게 되니 모두가 우울한 마음이었거니와, 내 마음도 착잡할 수밖에 없었다.

부산에 도착한 서울대병원 의사들은 1월 하순 전원이 육군임시 훈련소에 입대했다. 서면에 위치한 엉성한 시설에서 추위와 공복을 견디면서 약 2주간에 걸쳐서 군 장교로서의 기초훈련을 받았다. 밤중에 팬티만 입은 채 옥외에서 구보하는 등 단체기합도 받았고, 대학교수에 대해 기초적인 대우조차 전혀 해주지 않은 상태라 우울한 순간도 있었지만, 나라가 존폐의 위기에 놓인 만큼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여야 했다.

훈련을 마친 후 육군본부 의무감실에서 인사담당자가 와서 전원 집합시킨 다음 배속부대명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서면으로 개별통지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직접 호명하였다. “이 중령 5육군병원.”, "김 소령 3육군병원.“ 등 계속해서 통지를 해주다가 “문태준 중위 수도사단(首都師團)>” 이라고 호명되자 주위 모든 사람들의 동정어린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는 것 같았다.

“사단이면 일선 근무인데.......”. “후방의 육군병원에 비하면 위험한 곳인데......” 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독신인데다가 젊고 경험이 적은 외과의사인만큼 전방 배치가 당연한 것이라고 자위했다.

그런데 한 가지 난남감했던 일은 수도사단이 그 당시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는데다가, 인솔자도 없이 혼자서 즉각 아무 군용차라도 얻어 타고 찾아가 부임하라는 것이었다.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보니 수도사단은 당시 강능 북쪽에서 전투중이라는 것이었다.

부산에서 기차로 포항까지 가서 포항에서는 군 트럭을 타고 강구에 있는 옛집의 고모님 댁에서 1박 한 다음 동해안을 따라 북상했다. 눈은 내리고 도로상태는 좋지 않아서 강릉까지 몇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상사가 앞자리에 앉고 장교가 짐칸에 앉아가는 진풍경이었으나, 전투병과가 아닌 군의관 마크는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울진을 거쳐 삼척에 도착하니 대설이 내려서 국도는 겨우 통행이 가능할 정도였고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강릉시내 외곽에 있다는 의무대를 수소문하여 찾아서 겨우 도착하니 저녁이 깊었다. 그래도 여러 군의관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고 보니 피로가 가시는 듯했다.

고생길에 들어선 젊은 후배를 위해 약용 알코올과 5% 포도당의 칵테일과 오징어 안주로 열린 환영파티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