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사단 근무 (7회)

사단본부에 근무하는 것은 고참의 특권이이 기대조차 하지 않았고, 연대본부라도 근무했으면 하는 기대가 있었으나 결국 수도사단 기갑연대 제3대대 군의관으로 배치가 되었다.

기갑연대라고 해서 차만 타고 다니는 줄 알았는데, 막상 가보니 보통의 보병부대에 지나지 않았다. 그 당시 사단장은 송요찬 장군, 연대장은 이용 대령이었는데, 훗날 전쟁이 끝난 후에도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부산에서 2주간 받은 기초훈련은 경례하는 것과 군의 조직에 관한 지식뿐이었으며, 실제 전투에서나 환자 후송 등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선임상사의 도움을 받으면서 대대 의무대를 책임져야 했는데, 위생병들은 대부분 마산지역의 농촌출신이었기 때문에 의료에 관한 지식이나 기술은 당연히 없을 수밖에 없었으며, 압박붕대를 감아주거나 부상자를 후송하는 일을 주로 맡아서 했다. 그래서 시간이 나는 대로 부상자 응급조치에 관한 기본지식을 가르쳐주었다.

수도사단은 얼마 후 설악산 전투에 참가하게 되었다. 봄비가 내리는 저녁, 몇 시간 전까지도 활발하게 움직이던 병사가 최전선에서 후송을 하다가 적탄에 맞아 전사하여 시체가 되어 내려오는 광경을 보면서, 생사의 기로에 선 전쟁터에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고 착잡한 심경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설악산 전투는 격렬했으며 밤새도록 산봉우리를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기를 수차례 하면서 콩 볶는 듯한 소총 사격소리와 미 해군의 함포사격, 아군비행기의 폭음 속에서 전투가 진행되고 있었다.

개인천막을 치고 담요를 땅바닥에 깔아서 잠자리를 마련해도 비가 오는 날에는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군의관은 무기를 휴대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나 인접부대에서 군의관 납치사건이 발생하고부터 나는 칼빈소총을 항상 지니고 다녔다. 사실 북한군이 군의관이라고 해서 특별히 인도적으로 대접해줄 리가 없겠기에 군인으로서의 기본태세를 갖추어야 한다고 나는 믿고 있었다.

수도사단 전방에서의 전투는 큰 문제없이 진행되는 듯했는데, 동해 쪽에 있는 인접사단이 뚫렸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뒤이어 후퇴작전이 시작된다는 지시가 내려졌다. 보급이 여의치 않아서 비행기에서 낙하산으로 물자가 투하되었는데, 여러 색깔의 낙하산에 매달린 보급 상자가 가을 하늘에 떨어져 내려오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대대장이 작전회의에 갔다 오더니 심각한 얼굴로 우리 3대대가 수도사단이 철수하는 동안 적의 공격을 저지하는 후방 저지부대로 지명되었다고 말했다. 우리들은 대단히 위험한 지경에 처하게 된 것이었다. 사단병력의 대부분이 철수하고 나니 산 전체가 적막 속에 잠기게 되고 가끔 들려오는 함포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릴 뿐이었다.

이윽고 북한군의 공격으로 피차의 거리가 가까워오기 시작했다. 대대의 미군 고문관이었던 슈머드 소령이 긴장된 표정으로 나에게 와서 적과의 거리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어 오기에 나는 옆에 있던 박격포 포선의 기도가 60도 정도 된다는 것을 지켜보면서 매우 가까이 있다고 대답했다.

대대본부에서 드디어 명령이 내려왔는데 이때 예기치 않은 돌발사고가 발생했다. 동해에 위치한 미 군함의 함포 사격에 의해 발사된 포탄이 1개 분대가 들어가 있던 참호 부근에 떨어져 13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것이었다. 적이 가까워지고 있어 그대로 두고 갈수도 없고 후송할 인력은 없어서 막막하기만 한데, 마침 20명 가량의 노무자들이 지나가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 사람들도 전황을 알고 하산하는 중이어서 도움을 요청했지만 들은 체 만 체 하고 그냥 도망칠 태세였다. 어쩔 수 없이 총으로 위협하면서 반강제로 부상자 후송을 명령했다. 다행히 위생병들과 힘을 합쳐 별 어려움 없이 부상자들을 후송할 수가 있었다.

▲ 한국전쟁 당시 군병원 수용 부상병 [출처 ; 국가기록원]

적막한 산속, 언제 적군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불안감속에서 설악산을 내려오니 산 밑에 아군의 트럭 한대가 마지막 철수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곧 떠나야 한다는 연대본부 중대장을 간신히 설득해서 부상자, 위생병, 노무자 전원을 싣고 남쪽으로 향했다.

도중에 보니 통신병들이 전신줄을 거두고 있었고 공병대들이 양양 다리를 폭파할 준비를 끝내고 대기하고 있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100리 이상을 걸어야 했을 것이다.

1951년 가을, 수도사단은 지리산 공비소탕작전에 투입되었다. 우리 부대는 전남 구례군 일때에 주둔하여 조그마한 양지바른 마을을 대대본부로 사용하게 되었다. 부상자가 별로 없었기에 주민들을 상대로 봉사활동을 시작, 마을 사람들을 진료하기도 했다. 그러나 밤이면 공비(共匪)의 기습에 대비하여 철저한 경계를 했으며, 군복을 입은 채 잠자리에 드는 등 모든 최전선과 별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지리산 일대의 가을 풍경은 참으로 아름다웠고 설악산에서와는 달리 다소 마음의 여유조차 생겼다. 설악산 전투에서 워낙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다시는 산에는 오르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나중에 향로봉(香爐峰)에서 또 수개월을 보낸 것까지 합쳐 볼 때 나의 최전선 근무는 우리나라의 명산에서만 보냈던 것 같다.

그 후 전남 순천시에 위치한 사단 신병훈련소 군의관으로 파견되어 잠시 후방근무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란으로 인한 극도의 사회적 혼란 속에서 징집되어 온 신병들의 건강상태를 체크하여 전염병, 피부병, 영양부족 등의 여러 질병을 스크린 하고 대책을 세우는 일 때문에 업무량은 많은 편이었다.

대구에 피난해 있던 가족들을 휴가 때 방문하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는데 여수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가서, 거기서 기차로 대구까지 가는 긴 여행이었으나 아름다운 한려수도를 선편으로 여행하는 것은 잠시나마 전쟁을 잊게 해주는 즐거움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지리산 공비 소탕작전이 성공을 구둔 후에 부대는 다시 38선 부근의 전방으로 다시 이동했다. 전선이 현재의 휴전선 부근으로 고착되기 시작했지만, 우리가 배치된 향로봉의 여러 고지에서는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높고 푸른 가을 하늘 아래 단풍으로 물든 산정에서 멀리 바라다 보이는 금강산(金剛山)의 풍취와, 지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피나는 동족상잔의 싸움은 마치 천당과 지옥을 연상하리만치 극단적인 차이를 느끼게 했다. 때로 시간이 나면 영어 공부와 권총사격 연습도 하면서 일선대대 군의관 생활을 약 2년 가까이 했는데 이는 평균보다 꽤 긴 일선근무 기간이라 할수 있다.

군의 인사에는 학연과 로비가 영향을 미치는 시절이었는데, 나로서는 속수무책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느끼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긴 일선 근무가 그 나름대로의 뜻이 있었다.

매일같이 전투가 벌어지는 곳에서 근무하게 되니 담력이 커지고 생사에 대한 인생관을 정립할 수도 있었으며, 전투에 관한 상식과 지휘권 사용 등의 군사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간의 경험으로도 보병 중대 지휘 정도는 그다지 힘들지 않게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