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외과가 신설되었다는 소문이 나자 환자들이 줄을 이어 몰려와 나와 일반외과에서 파견된 수련의와 인턴으로 구성된 팀은 몹시 바쁘게 움직이게 되었다.
미국에서 신경내과를 공부하고 돌아온 서석조 교수와 훗날 대통령 주치의로서 애석하게 아웅산에서 희생된 민병석 교수 등이 환자 소개를 많이 해주었다. 머리와 척추의 외상환자가 많았고, 특히 서울역 앞이라는 지역적 특성 때문에 교통사고 환자가 많았으며, 나는 응급실에서 가장 많이 찾는 의사가 되었다.
수술실의 장비도 지금에 비하면 빈약하기 짝이 없었으며 병원 전체의 수술실이 4개밖에 없었다. 신경외과 수술에 필요한 장비가 있을 리가 없었으나, 다행히 내가 미국에서 가져온 몇 개의 수술기계가 기본을 이루어 대부분의 수술을 하는데, 큰 지장은 없었다. 그러나 가장 필요로 하였던 전기메스는 공군병원에서 수술 때마다 빌려 쓰는 수밖에 없었으니 초창기의 신경외과가 얼마나 어려운 처지에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수술대를 비롯한 신경외과 수술에 필요한 장치도 내가 설계해서 대장간 같은데서 만들어 쓸 수밖에 없었다. 제퍼슨대학 시절 수술기기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예가 과장이 기구를 스스로 고안해서 만들어 쓰는 것을 가끔 보았는데, 그것이 큰 도움이 되었지만 새로 개척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뇌척추 외상환자 수술은 과거 일반외과 의사들이 할 때와는 방법에서 크게 차이가날 뿐 아니라 결과도 양호해서 환자가 집중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수련을 받을 때 뇌경박하혈과 수술결과가 가장 극적이어서 혼수상태에 있던 환자가 혈과 제거와 동시에 수술대에서 깨어나는 경우가 많아 신비스러울 정도였기 때문에, 한국에 돌아가서 이런 환자가 많으면 신경외과의 명성이 하루아침에 높아질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첫 수술 환자가 뇌경박하혈과로 혼수상태에서 입원한 중년의 남자였다는 것도 행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전신마취도 하지 않고 국소마취로 약 5cm의 절개를 하고 두개골에 작은 구멍을 뚫어 뇌경막을 열어서 약 200cc의 혈괴를 제거하니 환자는 곧 의식을 회복하게 되었다. 신경외과가 창설 한 후 첫 수술이라 하여 많은 의사와 학생들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는데, 놀라운 효과가 나타났으니 그 소문이 퍼질 수밖에 없었다.
제퍼슨대학에서 진료한 병중에는 요추디스크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고, 예가 교수가 특별한 수술법과 기계를 사용하고 있었기에 치료성적이 대단히 좋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좌골신경통으로 불리우는 질환으로 약물요법에 의존해 왔으며 디스크라는 병명 자체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좌골신경통환자의 외과적 치료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 결과, 신경외과 환자의 약 3분의 1을 경추 또는 요추디스크환자가 점하게 되었다. 이 전통이 이어져서 세월이 흘러간 후 연세대학교 영동세브란스 병원에서 김영수 교수의 책임 하에 세계적 규모의 척추센터가 설립되어 명성을 얻고 있으니 만족스러운 일이다.
정형외과 중에서도 디스크 환자를 진료하고 있어서 양과(兩科) 사이에 다소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선의의 경쟁에 맡기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대부분의 디스크수술을 신경외과에서 하게 되었다. 신경외과에 전속되는 수련의를 확보하는 것이 환자진료는 물론이고 학문발전에도 불가결한 일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
|
| ▲ 현재 위치인 신촌의 완공된 세브란스병원(1962.) [출처 ; 연세대학교 학술문화처 기록관] |
|
외과에서 김춘규, 이영호 박사 등이 강사로 신경외과에 약 1년씩 근무하게 되어서 크게 도움이 되었고, 전임수련의는 과를 창설한 후 수년 만에 최고수준의 젊은 의사인 최규웅, 한윤선, 이규창, 김병래, 정상섭 박사 등이 신경외과 수련의를 끝마치고 훗날 교수로서 우리나라의 신경외과를 이꿀어 가는 지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국내의로 명성을 얻었으니 자랑스럽다.
신경외과는 진료 면에서나 수련의 교육면에서나 제퍼슨대학 방식을 대체로 준행했으며, 사소한 일로서 환자의 생명이 좌우된다는 생각에서 완벽주의를 엄격하게 지켜나갔고, 최고의 수준과 우수성을 강조했다.
뇌수술에서는 극히 작은 출혈로도 환자가 사망할 수 있으므로 지혈을 완벽하게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수술시간을 단축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환자를 마취라는 비정상적인 상태에 두는 것이 짧을수록 좋고, 또 긴 수술시간으로 감염과 같은 합병증의 발생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으로 사전의 면밀한 준비로서 수술시간의 단축을 강도 높게 실천했다.
연세대 재임 시의 훗날 안국병원 시절에도 의료사고가 대단히 적었음은 퍽 다행스런 일이었다. 나는 환자와 그 가족들과 수술 전에 수술의 성공률과 예측되는 후유증 등에 관해, 그리고 비용문제에 이르기까지 충분한 대화를 했으며, 수술의 적응에 있어서 신중성을 지켜나갔다. 근래에 와서 의사와 환자 간의 대화부족이 문제가 되고 있고, 선진국에서는 “충분한 설명과 동의”가 상식화 되고 있는 점을 생각해보게 된다.
국립의료원에 스웨덴 사람인 우라브손 박사라는 외과 과장이 있었는데, 친하게 되어서 집으로 저녁식사를 초대한 일이 있다. 그때 내가 외과 의사로서 가장 필요한 요건이 무엇이겠는가 라는 질문을 했더니, 우라브손 박사는 “수술을 하고 싶어 하는 충동을 쟈제할 수 있는 능력이다.”라고 대답한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필요 없는 수술을 피해야 하고, 다른 방법의 치료로서 회복이 어려울 때에만 외과적 방법을 사용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지만 흔히 젊은 외과 의사들이 수술을 조급하게 시행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 우라브손 박사의 대답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반면에 너무 우유부단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시기를 놓치는 것도 큰 문제라고 느껴질 때가 있기는 하다.
나는 환자나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너무 무뚝뚝하고 자상하지 않다는 평을 들을 때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러운 점도 있고, 후회스럽기도 하지만 의사가 환자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친절은 최선을 다해서 병을 고쳐주고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아무리 말로만 친절해도 진료결과가 나쁘면 별 볼 일이 없는 것이다. 무뚝뚝한 대신 나는 필요 없는 약이나 주사 등은 절대로 투여하지 않았다고 자기 변명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디스크 치료에 권위가 있다는 평이 나서 많은 저명인사들이 찾아왔는데, 수술할 필요가 없고 단지 운동과 물리치료나 하면 된다고 하면서 10분만에 그냥 돌려보내니까, 그 환자들이 집에 돌아가서는 불친절하다고 불평을 한다고 들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수술 없이 자연 치유되어 훗날 골프장에서 만나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외국에 비해 주사와 약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 사실이고, 이러한 관습 속에서 살아온 환자로서는 진찰만 하고 돌려보내는 것을 푸대접하는 것같이 느끼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친 김에 환자를 진료하면서 느낀 가장 고통스러웠던 일들에 대해 몇 가지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미국과 달라서 어떤 환자가 병원에 입원하면은 가족이 함께 병원으로 이동하는 것이 보통이다. 서울대병원과 같은 큰 종합병원에서도 승강기가 출퇴근 때의 전철과 같이 항상 꽉 차서 이용하기가 참 불편하다. 미국의 설계회사가 미국식으로 병상수를 기준으로 하여 필요한 부대시설을 결정한 모양이다.
환자 혼지 입원하고 가족도 면회시간에만 방문하는 것이 선진국과 우리나라의 관습의 차이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승강기뿐만 아니라 화장실 등 다른 부대시설의 부족현상도 심각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 많은 가족, 먼 친척까지 포함해서 여러 명의 보호자들이 환자의 상태나 수술의 결과에 대해 번갈아가면서 질문을 하게 되니 바쁜 의사들은 같은 대답을 되풀이하면서 귀중한 시간을 빼앗기에 되어 고통을 받게 된다.
그러면서도 그렇게도 깊은 관심을 보이던 사람들이 수혈얘기만 나오면 헌혈을 피하려고 순식간에 사랴져 버린다. 치료비 이야기를 할 때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