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보건기구(WHO-World Health Organization) 총회에 내가 보건사회부 장관으로 참석했을 때 미국대표로 참석한 쿠프 박사와 재회하여 옛날 이야기로 꽃을 피우기도 했다.
그리고 에이즈 문제에 관해서도 깊이 논의했는데, 아직까지는 효과적인 치료법을 발견한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에 오직 보건교육만이 최선의 예방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전 세계의 언론이 쿠프 박사에게 집중될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수개월 후 보건청장직에서 물러난다고 하기에 은퇴하느냐고 물었더니 70세의 노령인데도 은퇴는 있을 수 없고, 단지 다른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1992년 미시간 안-아비시의 한 서점에서 쿠프 박사의 회고록을 발견했을 때는 참으로 기뻤다.
나는 그것을 사서 밤새는 줄 모르고 읽었다. 의사가 걸어온 길, 의료와 종교적인 신념, 행정부에서 일하면서 얻은 고통, 그 자신이 보수주의자이면서도 보수주의 정치인들과 사회단체들과 겪어야 했던 갈등 등이 남의 일 같지 않게 느껴져서 흥미로웠다.
제퍼슨 병원에서의 수련의 생활 3년째에는 필라델피아에 아파트를 얻어서 통근할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인턴과 1년차, 2년차 수련의 들이 기초적인 일을 처리하기 때문에 나는 간단한 수술을 집도하거나 교수가 집도할 때 조수로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때 예가 교수가 심장질환에 걸려 힘든 일을 회피함에 따라 수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내가 하게 되어 보통의 수련의 보다는 더 많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또 나중에 제퍼슨의 혈액내과 교수가 된 중동 출신의 후라니 박사와 같은 아파트를 쓰게 되어 다른 나라 사정과 민족성을 배우게 되는데 많은 도움이 되기도 했다. 여기는 물론 없었지만 일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취미를 가질 수도 없었다.
간혹 일요일이면 자동차를 몰고 애틀란타 시까지 가서 대서양을 바라보거나 새로 건설된 아름다운 고속도를 달리면서 주위의 경치를 즐기기도 했다. 미국 독립운동사의 유명한 사적지인 바래에 포지도 가끔 방문했고, 휴가를 얻어 스페인에서 온 친구와 함께 포코노 산장에서 지내기도 했다. 산을 뒤덮은 가을의 아름다운 단풍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 당시 미국에서는 일반외과 1년을 마치고 난 다음 3년간 신경외과 수련을 받는 곳도 잇고 인턴 후에 3년간만 수련을 마치면 전문의 시험자격을 얻기도 했는데, 나는 서울대학병원, 군의관 시절의 경험을 인정받아 3년간의 수련의로 신경외과 과정을 끝내게 되었다.
예가 교수는 내가 신경외과에 남기를 강력히 희망했고, 근무조건도 나쁘지 않았지만 나는 반드시 한국으로 돌아가서 6.25로 황폐화 된 조국을 위해 일해야겠다는 굳은 결의가 있었기에 이를 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예가 교수의 나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에 대해서는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실 아시아 대륙 거의 대부분이 적화되고 소련과 중국의 압력이 더욱 강해지고 있던 당시의 정치정세와 지형적으로 붉은 대륙의 끝에 붙어 있는 작은 반도의 절반에 지나지 않는 우리나라가 과연 공산침략을 견딜 수 있는 일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할 때 불안하기도 하였다. 미국에 남아 평화롭고 안정된 분위기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환자를 진료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매력을 느끼게 했고, 많은 한국인 의사들이 그 길을 택했다. 그러나 나는 많은 위험부담을 안고서도 나의 길을 선택했다.
그때까지 우리나라에 신경과를 전공한 분이 거의 없었다. 신경과는 신경정신과의 일부분으로서 독립되지 못했기 때문에 신경외과 환자진료에 필수적인 신경내과 전문의와의 협의가 여의치 않을 것에 대비하여 신경과도 공부했으면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다행히 신경과 과장인 알퍼스(Alpers) 교수가 흔쾌히 받아 주어서 약 6개월간 신경과 연구소에 연구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여러 신경과 질환에 대한 새로운 진단법과 치료법, 그리고 뇌파검사에 관한 지식 등을 익힐 수 있었다. 또 오랜만에 환자진료에 대한 책임감 없이 책과 더불어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저명한 알퍼스 교수는 신경과 교과서의 저자이고 많은 제자들을 데리고 있었다. 교실에는 유태계 교수가 많았는데, 나에게 퍽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민족 고난의 역사를 함께 지니고 있는 소수민족으로서의 공통점 같은 것이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알퍼스 교수는 매일 아침 6시 50분에 10번가 쪽에 있는 이발소에 가서 구두를 닦은 다음 아침 7시 정각에 병원에 도착하여 회진을 시작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온화하고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모습이었고, 제자교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분이었다. 그 결과 많은 제자들이 여러 대학의 교수가 되어서 알퍼스학파가 형성될 정도였다.
이 분의 호의에 대해 나는 아무 보답도 하지 못했지만 유태민족에 대한 나의 친근감은 이때부터 시작되었고 국회 운영위원장 때에는 당시 이스라엘 국회의장 자격으로 방한한 샤밀 수상 일행을 위한 만찬에서 알퍼스 교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것이 기억난다.
1954년 7월부터 시작된 나의 미국유학 생활은 3년 반 후인 1957년 12월에 끝마치게 되었다. 힘들었지만 아름다운 추억으로 가득찬 시절이었다. 그동안 나를 참으로 잘 보살펴주었던 교수, 동료들과 헤어지게 되어 마음이 착잡했다.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때만 해도 국제전화는 거의 불가능했고 휴가를 얻어서 일시 귀국한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태평양을 건너 서신만 왔다갔다 하던 때였으므로, 가족들과는 긴 세월에 걸친 이별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궈국한 지 약 1년 후에 신경외과 전문의 시험을 치르기 위해 재차 도미했다. 박봉의 강사시절이라 여비도 넉넉지 못했지만 1959년 10월에 미국 마이애미에서 개최된 신경외과 학회에 참석한 후 뉴헤이븐의 예일대학 병원에서 실시된 전문의 시험에 응시했다.
신경병리학 시험을 위해 YMCA호텔에 유숙하면서 여러 명의 수험생들과 함께 일주일간을 준비했다. 신경외과 전문의 시험에 실패해서 자살한 사람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대단히 분위기가 심각함을 느낄 수 있었다.
시험은 오전반에 배당되었는데, 일반외과, 신경과, 신경외과, 방사선진단학, 신경병리학 등을 각 과목별로 30분 내지 60분간에 걸쳐 2명 내지 3명의 미국의 저명한 교수들이 연속적으로 구두로 질문을 하는 것이어서 수험자의 실력이 쉽게 드러나기 마련이며 결코 적당히 넘길 수는 없었다.
긴장감이 극에 달하였지만 비교적 침착하게 시험을 치렀다. 합격 여부는 약 1시간 후에 전화로 알게 되어 있었다. 만약 떨어지면 한국에 돌아가서 체면이 서지 않을 터인데 라는 생각을 하면서 전화다이얼을 돌렸더니 합격했다는 축하의 목소리를 듣게 되어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점심식사는 서울대학병원의 외과학교실의 선배인 김정근 박사와 함께 했다. 김 박사는 유 햄프셔에서 역시 신경외과 수련을 끝마치고 같은 날 오후에 시험을 치르게 되어 있어서 점심식사도 제대로 못하는 것 같았는데, 오후 시험에서 합격이 되었다.
그래서 미시간대학에서 수련을 받은 이헌제 박사, 김정근 박사와 내가 미국 전문의 자격을 얻게 되어서 한국에서 이미 활동하고 있던 몇 분들과 함께 신경외과학을 시작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