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사 경험 (11회)

병원 생활도 1~2년이 지나니 퍽 익숙해졌고, 의사로서의 실력도 충실해졌다. 그러나 바쁜 것도 여전했고, 밤 11시까지 계속 근무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많은 해프닝도 있었고, 잊지 못할 일들도 많았다. 하루는 악성뇌종양 환자를 수술했는데, 수술 후 호흡이 중단되어 급히 인공호흡기에 연결했다. 55세의 남자인 환자는 그 후 뇌사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그런 상태가 며칠이나 계속되었다.

예가 과장은 회진을 할 때마다 소생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환자를 식물인간과 같은 상태로 방치한다는 것은 의학적으로 의미가 없을뿐더러 본인이나 가족들에게 지나친 정신적, 경제적 부담만 주는 것 같다는 의견을 보였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뇌사(腦死)에 대한 의학적인 규정이나 방침이 없을뿐더러 법률적인 해석도 없었다.

시일이 지나갈수록 부인을 비롯한 가족들의 고통은 점차 심해져갔으며 가족들은 인공호흡을 중단해줄 것을 여러 번 요청하기도 했다. 잠깐 인공호흡기를 중단해보았더니 자체 호흡은 없었고 산소와 수액으로 심장박동만 유지되고 있는 상태가 계속되었다.

교수는 가족들의 지시에 따르는 게 좋겠다고 지시했지만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화이트리 조교수는 묵묵부답으로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결국 이 문제는 법률적인 해결방법이 없으니 종교적인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래서 가톨릭신자인 가족들에게 신부님의 의견을 들어보도록 권했다.

며칠 후, 부인이 말하기를 신부님의 말씀이 안락사는 허용될 수 없으나 살아날 가망이 전혀 없을 때 외부에서 공급하는 산소나 수액주입과 같은 치료는 중단해도 무방하다는 대답을 얻었다는 것이다. 근래에 와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존엄사(尊嚴死)와 같은 내용의 해석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누가 인공호흡기와 스위치를 끄느냐 하는 문제가 남았다. 그런 경우 대체로 환자가족과의 일은 수련의장이 맡게 되어 있어서 내가 해결을 해야 될 위치에 있었다.

다시 며칠이 지나 이제는 결단이 필요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환자 부인이 자기가 환자와 가장 가까운 사이이니 스위치를 끄겠다고 해서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훗날 생각해보니 만일 이 사실이 당시 신문에 보도되었더라면 큰 사건이 되어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켰을 것이라는 짐작이 되었다.

1980년 후반에 캘리포니아주에서 어떤 의사가 이와 유사한 일로 살인죄로 기소되었다고 결국 무죄로 판결된 일이 있는데, 나의 경우를 되돌아 볼 때 나는 대단히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훗날 세계의사회장으로서 의료윤리 문제를 의논할 때마다 그때의 경험이 되살아나고 의료에는 윤리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곤 했다.

우리나라나 이웃 일본에서는 촌지를 주고받는 것이 관습처럼 되어 있지만 미국 의료계에서는 이런 일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3년의 수련의 기간 동안 딱 한번 촌지를 받은 일이 있었다. 그 환자의 직업은 의사였는데, 뇌종양으로 입원하여 수술을 받았으나 사망하고 말았다.

▲ 토머스 제퍼슨 대학이 설립자인 토마스 대통령 개념관

내가 담당하여 주야를 가리지 않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아 매우 허탈했다. 그 환자의 부인이 면회를 요청하기에 시간을 내어 만났더니 나의 헌신적인 노력에 고맙다고 하면서 남편이 당신을 무척 좋아했고, 수술 받기 전에 이것을 전달해달라고 했는데 기회가 없었다고 하면서 봉투를 내미는 것이었다.

50불이 들어 있었다. 사망한 남편의 감사한 뜻이니 받아달라는 것이었다. 극구 사양했지만 너무 간절하게 권하기에 감사하게 받고 난 다음 조교수에게 보고하고 허가를 얻었다.

요즘 제약회사와 의사와의 관계가 문제가 되고 있다고 듣고 있는데, 그 당시에도 여러 제약회사의 판매원들이 자기 회사 제품을 선전하고 다니기는 했지만 촌지 같은 것은 절대로 없었다. 단지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SPK회사 같은데서 1년에 한 번씩 수련의 전원을 저녁에 초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미국사회는 규칙보다는 상식선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며 이를 어길 경우 견딜 수 없게 되는 사회적인 불문율이 있다고 여겨졌다.

신경외과 조교수였던 화이트리 박사는 제퍼슨 병원에서 출생했으며 대학도 그곳에서 마치고 계속 제퍼슨 병원에서 근무한 제퍼슨 사람이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나중에 과장 심사 때 일부 반대자들이 광신자라고 공격할 정도의 기독교 신자였다. 그 분과 함께 일한 기회가 많았으며 교회에도 함께 가게 되었다.

기독교에 대해 생소하지는 않았지만 그때까지 나는 세례를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6.25 동란의 와중에서도 많은 환자들이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현장을 지켜보면서 의학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게 되었고, 종교에 의지하지 않고는 의사로서의 직무를 소행하는 것도 벽에 부딪힐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대학 예과 재학 당시 어떤 일본인 교수가, 의학도 결국은 종교와 무관할 수도 없을 것 같고 종교적인 사색 속에서 길을 찾게 될 것이라는 강의를 한 적이 있는데, 가끔 기억이 날 때가 있었다. 특히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병들었을 때 이를 치료하여 죽음으로부터 구하려고 애쓰다가 실패할 경우를 의사들은 누구나 경험하게 되는데 이때의 심한 좌절감을 극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나는 필라델피아 중심부에 있는 제10 장로교회에 주일마다 나가게 되었는데, 화이트리 교수가 이왕이면 세례교인이 되면 어떻겠는가 하고 권유를 해서 우선 성경공부를 같이 하기 시작했다.

1956년 봄부터 저녁 일을 끝마친 다음 박사의 진찰실에서 한 시간씩 요한복음을 일대 일로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약 4주 후에 반하우스(Banhouse)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한국에서 온 젊은 신경외과 교수가 세례까지 받은 기도교인이 된 것은 여러 신자들에게는 큰 관심사가 되었다.

그 후 나의 인생에 있어서 기독교는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기독교적인 의사로서 또 정치인으로서의 생활 여러 면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믿고 있다. 또한 의과대학 교수시절 매 학기마다 신경외과 강의 첫 시간에는 나의 인생관, 의학과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관례가 되다시피 했다.

제10장로교회에서 자주 만난 사람 중에서 측히 기억에 남는 사람은 그 당시 필라델피아 소아병원의 외과 과장이셨던 쿠프(Koop) 박사였다. 나는 그분 기독교적인 품위와 체취에 큰 감명을 받았다.

훗날 그분은 미국 보건청장으로서 많은 일을 했고 명성이 높았다. 금연, 에이즈, 낙태 등에 관해 분명한 의견을 제시하면서 미국 국민의 건강을 지켜나가기 위해 눈부신 노력을 했는데, 나로서는 그 분의 의견에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