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시 인턴은 숙식 제공에 월 25불의 수당을 받았고, 레지던트는 각과에서 지불하기 때문에 일정액이 없고 무보수에서부터 월 100불 정도의 작은 수당이 지불되었다. 양복 한 벌에 40~70불 정도였던 때였지만 800불을 가지고 몇 달이나 견딜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제일 큰 문제는 인력이 부족해서 수술 준비를 교수가 점심 먹는 동안에 끝마쳐 놓아야 했고, 일이 늦게 끝나 저녁시간을 넘기면 병원 식당이 문을 닫기 때문에 길 건너 식당에 가서 사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점심도 약 5분 내지 10분 안에 먹어야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오전 7시경부터 회진을 시작하여 환자를 진찰하고 처방을 낸 후 종일 수술실에서 수술을 거들다가 교수를 따라 회진을 하고, 저녁에는 새로 들어온 환자를 진찰하다보니 자정이 가까워서야 일이 끝날 때가 많았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후 그 병원을 다시 방문했더니, 옛날 나와 함께 근무하던 분들은 물론이고, 내 이야기를 전해들은 간호사, 의사들로부터 내가 가장 일을 많이 한 수련의, 또는 항상 적극적으로 일하던 젊은 한국인 의사로 평이 나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 내 인생에서 국회의원 선거 때를 제외하고는 춘천에서의 군의관 시절과 제퍼슨 병원에서 근무하던 시절이 가장 바쁘고 힘들었던 것 같다.
예가(Jaeger) 교수는 미국 신경외과학의 개척자 중의 한 사람으로 저명한 존스 홉킨스 대학의 월터 댄디(Walter Dandy) 교수의 제자이며 수술 기술이 뛰어난 분이다. 모든 것에서 완전무결한 것을 추구하였으며, 수술 성적도 대단히 좋아서 그 일대에서는 물론이고 미국 전역에서 명성이 나 있었다.
성격이 강해서 친구를 많이 사귀거나 외교적인 수완을 발휘하지 못하였으며, 조직적인 노력도 하지 않았다. 오직 환자를 돌보는 일에만 최선을 다했으며, 수술을 위해 필요할 때는 직접 환자의 머리를 깎는 일조차 서슴지 않았다. 학문 연구와 환자 진료를 빼 놓지 않고는 고독한 생활을 하면서 주말이면 대서양 연안의 휴양지인 비치 헤이빈에 있는 별장에서 바다낚시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나도 때때로 초대를 받기도 했다.
1990년, 집사람과 둘째 사위 부부와 함께 그 부근을 여행할 때 그곳에 가서 조그만 바닷가 식당에서 30여 년 전의 추억에 잠기면서 식사를 했다.
예가 박사는 기본적으로 수련의는 무보수라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병원생활이 두 달이 지났는데도, 보수에 대해서는 아무 소식도 없다가 석 달 째가 된 어느 날 내 우편함에서 교수의 편지를 받았다. 근무를 잘하고 있다고 치하하면서 소급해서 매월 100불을 수당으로 지불하겠다는 내용과 함께 수표가 들어 있었다. 그 당시 100불이 큰돈은 아니었지만 독신생활을 하는데 최소한 1개월 동안의 용돈은 충분히 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가족이 있는 수련의 한 사람이 사임을 하게 되어 일은 더 바빠졌고, 토요일 오후만 되면 밀린 잠을 자는데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인턴들은 대우가 너무 나쁘다는 이유로 불평이 많았는데, 하루는 승강기를 운전하는 노인과 인턴 한명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서 병원 당국은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사표를 받아야 하는 난처한 입장이 되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인턴이 그만두게 되면서 병원 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래서 그런지 알 길은 없었으나, 그 후부터 인턴과 레지던트의 개선되기 시작했다.
숙소도 동물사육사 옆에서 다른 곳으로 이전되었고, 2층 침대도 없어졌으며, 텔레비전과 냉장고가 설치되고 식당도 별도로 분리되어 제법 대접이 좋아졌다. 외국인 의사들은 이런 문제에 개입할 입장이 못 되었지만, 병원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관계로 가장 많은 혜택을 보게 된 셈이었다.
그 당시의 내 영어실력으로는 환자에 관한 각종 임상기록, 특히 수술기록과 퇴원 시의 종합보고서를 쓰는데, 힘이 들었다. 그래서 교수실에 근무하는 비서들에게 구술해주면 그들이 타자를 쳐서 서류를 작성해 주기 때문에 서투른 영어가 어느 정도 보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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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의 제퍼슨대학병원 본관 [출처 ; IS유학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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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내게 더 많은 역할을 부여하고 싶었던 과장은 그렇게 해서는 내 영어실력이 향상될 것 같지 않다고 판단했는지 구술하는 대신 내가 녹음기에 녹음을 해주던 기사가 그것을 틀어서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방침을 바꾸어버렸다. 바로 대면해서 말해도 알아듣기 힘든 판에 녹음기를 틀고 타자를 치자니 알아들을 수 없는 부분이 상당히 많았을 것이다.
그때마다 나를 전화로 찾아서 물어 보아야 하니 그렇지 않아도 응급환자가 많은 신경외과에서 근무하는 관계로 원내방송으로 제일 많이 호명되던 나였는데, 나를 찾는 방송이 종일 그칠 줄 모를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제퍼슨 병원에서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고, 차츰 영어실력도 좋아졌다.
뇌와 척추외상 환자 치료에 대해서는 전쟁터에서 경험이 있어서 별 어려움이 없었지만 중양, 신경통, 특히 디스크 진료분야에서 놀랄만한 기술들을 배울 수 있었다. 참으로 귀중한 기회를 얻은 것이었다.
미국은 세계 최강국이었고, 전세계 GNP의 45%를 차지하고 있을 때였으며, 사회적 기풍도 건전했다. 기독교 정신이 사회에 튼튼하게 뿌리내려 인정이 많았고, 어려운 이웃은 물론이고 어려운 나라에 대해서도 원조를 ㄹ아끼지 않을 때였으며, 한마디로 사회가 건전하고 인심도 좋았던 시절이었다.
필라델피아는 미국의 역사적인 도시로서 팬실버니아 대학병원과 제퍼슨 대학병원이 의학적으로 최고수준을 자랑하면서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제퍼슨은 사립대학으로 시내 중심가에 위치하고 있는 단과대학인데 서울역 앞에 있는 세브란스 병원과 비슷한 분위기와 역할을 하고 있었고, 팬실버니아대학은 종합대학으로 서울대학교와 비교해 볼 수 있었다.
훗날 제퍼슨 대학은 한국인 교수가 제일 많이 근무하고 있는 대학으로 1990년에는 그 수가 12명에 이르기도 했다. 그래서 대한민국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한국인 교수가 있는 대학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와는 인연이 깊은 대학이 되었다.
1950년 당시에는 내과에 로버트 차 교수가 재임하고 있었는데, 차 교수는 평양 출생으로 어릴 때 미국으로 건너가서 제퍼슨 의대를 졸업한 후 의사가 되었으며, 진단학을 주로 강의했고,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교수로 선출될 정도로 명강의를 했다.
차 교수의 초대로 댁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미국인 부인과 딸 하나를 둔 단란한 가정을 꾸며 살고 있었다. 그 당시 국제결혼은 어려운 일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세 식구가 정답게 살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또 서울대학교 선배이신 이광수 선생이 약리학 교수로 재임하고 계셔 마음이 든든했다. 그밖에 나중에 서울대 과장이 된 문형노 교수가 소아과 레지던트로 왔으며 필라델피아시의 사립병원에; 김형균 교수, 감리병원에 민병석 교수,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윌스 안과병원에는 최창수 교수 등이 근무하고 있어서 가끔 만나 우정을 돈독히 할 수 있었다.
서울대 1년 선배인 김형균 교수와는 주말이면 자주 만나 중국집에 가거나 시립병원의 숙소에서 함께 식사를 할수 있어서 향수를 달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제퍼슨 대학병원에도 외국인 수련의가 점차 늘어나서 스페인, 노르웨이 등 유럽 여러 나라와 남미, 중동 등에서 온 의사들이 보이기 시작했으며, 특히 크리스마스 때와 같은 미국인의 휴가철에는 수련의 숙소에는 외국인들이 주로 난ㅁ아 있게 되어서 서로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특히 스페인의 버사로나에서 온 신경내과 수련의 캄포수는 성격이 매우 쾌활하고 붙임성이 있어서 나와 퍽 가까이 지냈다. 그 친구한테 가끔 스페인 요리도 배웠는데, 그때 익힌 솜씨로 훗날 서울 집에서 가족을 위해 스페인 요리를 만들어보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