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1회)

나는 1928년 1월 14일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면 남석동에서 부친 문일수 씨와 모친 이수자 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님 되시는 문명기 씨는 원래 평안남도 안주(安州)에서 출생하셨으나 16세 때 단신 남쪽으로 내려오셔서 경상북도 일대에서 금광과 수산업을 시작하시면서 영덕에 정착하셨다. 안주에서는 문씨 가문이 주로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가르치거나 농사에 종사했다고 들었다.

조모님은 경상북도 영양군 출생의 밀양 박씨였으며 일찍 돌아가셨다고 한다. 부친은 영덕에서 많은 사업을 창업하셨으며, 동해안의 이름난 항구인 강구(江口)에서 수산업과 양조장을 경영함에 따라 내가 세 살 되던 해에 강구로 이사했다.

강구는 작은 어항이기는 하지만 경치가 대단히 아름답고 수산업이 성행하여 매우 활기찬 곳이었으며, 우리는 그곳에서 해방이 될 때 까지 살았다. 조부님께서 하시는 사업은 번창일로에 있었으며, 금광, 수산업 외에도 운수업에까지 관여하게 됨으로써 경상북도 일대에 널리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고, 일제하에서 민선 도의원을 거쳐 중추원 참의원까지 지내시게 되었는데, 이 일로 인해 나중에 물의가 일어나기도 했다.

조부님께서는 영덕 지방 발전에 남달리 관심이 많으셔서 여러 가지 공공사업들을 유치하셨는데, 연세가 많으신 분들은 지금까지도 이 일을 기억하고 계실 것이다. 한학에 능하셨으며, 인생을 낙천적으로 살아가시고 근검절약의 정신이 투철하시며 물욕이 별로 없으셨던 분으로 기억한다.

부친께서는 음악에 소질이 많으셨으며, 자식들의 교육에 깊은 정열을 쏟았다. 하시는 사업이 순조롭게 확장되어 감에 따라 1930년대 후반 포항에 회사와 공장을 설립하셨다. 그러나 인생의 전성기에 6.25동란이 발발하여 서울에서 북괴군에게 피납 되셔서 지금까지도 생사를 모르고 있다. 아마도 비극적으로 인생을 끝마치신 것으로 생각되어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다.

공산주의자들의 비인간적인 만행은 모두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진실로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그 와중에서 부친 또한 불운의 희생자가 되신 것이다. 아버지의 납북 후에 온 가족이 큰 시련의 세월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영천(永川)출생으로 이화여중(梨花女中)을 졸업한 어머님은 5남매를 키우면서 집안을 지키시기 위해 초인적인 노력과 희생을 하셨으며, 이는 우리들 모두에게 큰 감동을 남기셨다.

나는 강구에서 영덕에 있는 보통학교까지 매일 20리 길을 걸어서 통학했다. 당시 강구에는 일본인을 위한 학교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내가 통학했던 길은 오십천(五十川)이라는 제법 큰 물줄기의 강변과 들판을 따라 뻗어 있는 매우 아름다운 도로였다.

길 양쪽에는 포플러나무 가로수가 줄을 지어 서 있었는데, 이 아름다운 풍경은 지금도 나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매일 왕복 40리를 걸어서 통학한 것이 기초체력을 단련시키는데도 크게 도움이 되었고, 이것이 지금의 내가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일제시대의 수창초등학교 / 일제시대에는 대구공립제2심상소학교라 불렀다 [출처 ; 심상초등학교]

중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도시에 있는 국민학교에 가서 입학시험 준비를 해야 했기에 5학년 때에 아름다운 고향산천을 떠나 대구의 수창국민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어린 시절부터 객지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부친의 가까운 친구였으며, 교육자이셨던 주대식 선생님 댁에 기거하면서 생활과 교육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은 지도를 받았고, 자립정신을 키울 수도 있었다. 나는 학교 측의 권유로 일본인 중심의 대구중학교에 진학하였다.

그 당시 대구중학교는 한 반에 한국인이 1~3명 뿐이어서 참으로 외로웠으며 정신적인 압박감도 대단했다. 그런데 입학 초에 이변이라 할 만한 사건이 발생했다. 반의 급장 선거에서 한국인인 내가 다수표를 얻은 것이다. 그 이유를 지금도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아마 체구가 남보다 크고 다른 학생들보다 다소 두뇌회전이 빨랐던 것이 이유가 아닌가 싶다.

또 비록 일본인들일지라도 어린 학생들 사이에서는 민족차별 의식이 그다지 뿌리 깊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 후 전체 조회시간에 각반 급장의 임명식을 가졌는데, 우리 반은 내가 아닌 차점자가 급장으로 발표되었다. 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입학하자마자 현실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자 순진한 차점자는 자기가 아니고 내가 당선되었다고 하면서 전 학생과 선생님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서 큰 소리로 잘못을 바로 잡을 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학교 당국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다음 학기에서 나에게 급장을 시키겠다고 약속하고 겨우 사태를 수습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선거제가 폐지되고 임명제로 제도가 바뀌었으며, 급장을 시키겠다는 약속도 나를 부급장에 임명하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다.

민족차별이 있다는 것을 고향에 있을 때도 가끔씩은 느꼈었지만 어린 시절이었기 때문에 확실한 내용은 잘 몰랐는데, 이렇게 노골적으로 당하고 보니 내 스스로 실력을 기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뛰어난 성적을 얻기도 해야겠지만 능력도 있어야 되겟다는 생각에 단단히 결심하고 유도부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시간만 있으면 유도장에서 뒹굴다보니 차츰 실력도 늘어나게 되어 1년 후에는 제법 강한 선수가 되었고, 3학년 때 초단, 4학년 때 2단을 따게 되었다. 같은 또래 학생 20명 정도는 차례로 넘어뜨릴 수 있었으며, 대구의 무덕관에서는 경찰관이나 형무소 간수 등 일반인들과도 대등하게 겨룰 서 있게 되었다.

유도선수가 됨으로써 나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학교 내에서 한국인에 대한 멸시를 의식하지 않아도 될 정도까지 되었으니 퍽 다행스러웠다. 그리고 더운 날, 추운 날을 가리지 않고 매일 아침과 저녁에 운동을 열심히 했기에 비록 고통은 컸지만 체력 향상과 함께 인내심과 자신감을 키우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일본의 군국주의가 절정에 달하여 병영(兵營)처럼 변해버린 환경에서 중학교육을 받고 있을 무렵, 나를 고민 속에 빠뜨린 사건이 생겼다. 4학년 때인 어느 날, 일본인 교장이 나를 부르더니 일본의 육군사관학교(陸軍士官學校)에 지원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표시한 것이다. 성적도 우수하고 체력도 좋으니, 남자답게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길을 선택하라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이런 식의 강요가 매우 많았고, 그러한 강요에 의해 일본 육사에 지원한 사람이 꽤 있었으며, 그 중에는 훗날 우리나라의 저명한 군 지도자가 되신 분들도 있다. 그러나 나는 군인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며, 보모님의 강한 반대도 있었기에 이를 어떻게 모면하느냐가 큰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