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그리고 국민당정권 (5회)

산더미처럼 쌓아올린 석탄 더미에 천막을 덮어 놓은 링은 제법 푹신했다. 솜옷을 크게 말아 복싱 글러브를 만들자 마치 솜사탕을 두 주먹에 감은 것처럼 얼굴보다 커졌다. 제법 진지하게 심판까지 두며 시합을 벌였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북경에서 철로를 통해 죽을 고비를 넘기며 상해로 살아 돌아온 나에게 복싱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우리가 복싱시합을 벌이는 석탄 저장고는 동네 어귀에 있었다.

나무 울타리를 치고 산더미처럼 쌓은 석탄을 천막으로 덮어 놓았다. 그 위에 올라가면 마치 구릉 진 산꼭대기 같았다. 동네가 되는 골목에 대문이 있고 그 안으로 담을 둘러쳤는데, 담을 끼고 네모반듯한 마당 입구 옆에 석탄저장 창고가 있었다. 석탄 더미 위에 올라서면 석탄저장 창고의 뾰쪽한 방범용 쇠창살을 단 담장의 높이가 머리에 닿을 정도였다. 그 꼭대기가 동네 친구들과 나의 복싱 시합장이었다.

야외 링에서 경기가 벌어지는 날이면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로 복싱은 상해에서 인기 있는 스포츠였다. 외국인들이 주인 노릇을 하는 도시인지라 중국인은 특히 조계에서는 대접을 받지 못 했다. 때문에 “동아병부(東亞病夫)”라고 업신여기는 서양인 격투가를 속이 후련하도록 혼내준 중국 권법가들의 과장된 영웅담이 많이 전해졌다. 이런 민족의식을 바탕에 둔 권선징악류의 이야기들이 마음에 불을 지펴 골목의 아이들도 복싱을 즐기게 된 것이다.

시합이 시작되었다. 긴장으로 가슴이 뛰는데, 친구가 펀치를 쭉 뻗어왔다. 나는 상대의 펀치를 비껴내려다가 중심을 잃고 뒤로 밀려났다. 휘청거리는 순간, 운 나쁘게도 쇠꼬챙이가 빽빽이 박힌 담장에 부딪혔다.

“퍽!” 담장에 머리를 부딪친 찰나, 무언가가 머릿속으로 들어와 박히는 느낌 이었다. 그 와중에 반사적으로 반동을 이용해 다시 빠져나왔다.

간신히 몸을 바로 세우려다 바로 고꾸라져 버렸다. 들어와 박힌 이물감은 다시 머릿속의 모든 것을 끌고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분명히 푸른 하늘이 두 눈에 가득 들어왔다. 이어 갑자기 하늘이 사라지더니 부신 햇살만 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기관총이 햇살과 함께 쏟아지는 철로변 같았다. 목마른 사막 한가운데를 힘없이 버티어선 환영처럼 다가왔다. 짧은 햇살이 꺼지고 이내 어둠이 몰려왔다. 스르르 눈이 감겼다. 쇠꼬챙이에 찔린 머리가 흐물흐물 물러지더니 쏟아져나갔다.

“아악! 큰일 났다!”

친구들이 질러대는 비명 소리가 귓전에 윙윙거렸다. 머리를 꽉 쥐었다. 손이 끈적끈적했다. 시뻘건 피가 손바닥을 홍건히 적셨을 것이다. 하지만 울지 않았다. 그래야만 될 것 같았다. 남자는 그 정도 고통쯤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관총탄도 울리지 못 했던 내가 아닌가.

죽는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렇게 죽을 것 같았으면 분명히 철로에서 기관총에 맞아 죽었으리라. 다쳤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분한 것은 주먹을 단 한 번도 내밀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나는 인력거에 실려서 급히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나는 의식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 와중에 어머님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내 손을 꼭 잡고 계셨다.

콧날이 우뚝하고 둥근 안경을 쓴 영국인 의사가 급히 와서 내 상태를 보더니 간호사들에게 무언가를 지시하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씩 의식이 멀어져 갔다. 의식이 돌아왔을 때는 아버님이 침대 맡에 앉아계셨다.

“얼굴이 아니라 머리여서 그나마 다행이다.”

그날 저녁 상처 부위를 스무 바늘 정도 꿰맨 후 붕대를 머리에 칭칭 감고서 병원을 나섰다.

아버님은 내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독립군 같구나. 장하다!”

격려해주시고는 다음날 아침 일찍 사업 때문에 북경으로 떠나셨다. 아버님의 말은 어려서는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어려울 때마다 힘이 되고, 용기가 되어 내가 ‘독립’ 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훗날 세계사를 배우면서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은 자신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미국의 독립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경외심 같은 것이었다. 어쩌면 그런 생각이 나를 미국으로 이끌었을지도 모른다. 미국에서 살며 매년 독립기념 일을 보내면서 누구보다도 독립의 의미를 절실하게 되새기면서 살아왔다.

독립은 주권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해방과 자유만이 진정한 독립은 아니다. 자신이 스스로의 힘으로 구속을 벗어났을 때 실존적 의미의 독립이 이루어진다.

1945년 6월이 되자 홍구(虹區) 지역에 연합군의 공습이 잦아졌다. 일본인들은 조계로 몰려들었다. 한 여름의 더위가 한풀 꺾이는 8월 15일, 소학교로 등교하는데 거리 어디선가 라디오 방송이 들렸다.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는 방송이었다. 일본이 항복한다는 내용이라는 것을 어린 나이였지만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학교에 가니 영국인 선생님이 말했다.

“전쟁이 끝났으니 오늘은 수업이 없다. 집에 가거라.”

나는 해방이 되었다는 말보다는 어린 마음에 집으로 가라는 말이 더 기뻤다. 사람들이 다들 거리로 몰려나왔고, 만세를 불렀다. 나도 괜지 모르게 감격해서 “만세! 해방이다!” 큰소리로 외치며 골목길을 지나 단숨에 집으로 달려갔다. 어머님과 식모가 짐을 싸고 있었다.

“엄마, 어디로 가요?” 어디로 떠나는 듯한 느낌에 궁금해져 물었다. 어머님은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안으셨다. “우리 장군, 이제야 우리 가족은 조국으로 돌아간다.”

나 역시 감격이 되었는지 목이 메었다. 이제야 비로소 한국인인 나를 찾게 되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꿈에서조차도 조국은 너무나 먼 나라였고, 구체적인 이미지마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중국에서는 “항전승리(抗戰勝利)”라고 했다. 8년 항전이 승리로 끝난 이후 정국은 어수선했다. 일본이 패망하면서 국민당군은 미국의 힘을 등에 업고 상해를 비롯한 양자강 이남의 전 지역을 장악했다.

▲ 부대를 검열하고 있는 국민당정권의 장개석 총통

사회적 혼란 역시 해방 후의 우리나라와 다르지 않았다. 치안도 엉망이었다. 일본 패망하자 일시적 권력 진공상태에서 중국인들은 혼란을 이용해 한국인을 일본의 앞잡이로 간주해 온갖 폭행과 약탈을 자행했다. 군인이건, 민간인이 건 마찬가지였고 국민당이 들어와서도 변하지 않았다.

국민당이 들어오자 국민당군과 함께 연합전선을 편 미군과 산더미 같은 물자가 밀려들어 시장 기능도 마비되었다.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살인적인 인플레 때문에 돈을 전부 금으로 바꾸어 가지고 있었다. 국민당의 적산 접수가 시작되자 군대의 부패와 비리는 헤아릴 수 없이 자행되었다.

어느 날 국민당 군인들이 마구잡이로 쳐들어와서 온 방을 다 뒤지고는 어머님이 숨겨둔 금덩어리를 훔쳐 갔다. 아버님이 국민당 총통부관에게 가서 강력히 추궁했다.

“주민을 보호해야 할 군인들이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당황한 부관은 군 지휘계통을 통해 조사하겠다고 하더니 한참 후 통보해왔다.

“범인을 체포해서 즉석 총살형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강탈해간 금은 결국 반환되지 않았다. 아버님은 국민당의 기강이 약해지고 위계질서가 흔들리며 민심이 이반하는 모습을 목도하면서 예견했다.

“이렇게 부패한 상황을 그냥 둔다면 앞으로 중국은 모택동의 공산당 천하가 될 것이다.”

아버님의 정세 판단은 정확했다. 중국 본토가 공산화된 이유도 국민당 정부의 부패와 비리, 그리고 실정 때문임을 우리 가족이 당한 사건을 통해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리 좋은 시스템도 그것을 운영하는 자들의 준법정신과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소용이 없다. 타락한 정부는 민심을 얻지 못한다. 민심은 천심이다. 국민당에 대한 역사적 교훈을 얻지 못한 채 광복 후 한국도 같은 실정이 거듭되었다. 자유당 정부가 그런 잘못을 저질렀다. 그로 인해 4·19 학생의거가 일어났고, 이어 5·16 군사쿠데타로 이어졌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 수레바퀴처럼 굴러가는 역사 속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똑같이 비참한 결과를 맞게 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