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장 사건
북한에서의 모든 일정은 상부에서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관례인데, 나는 안내원들에게 은근히 심리전을 펼쳐봤다.
“평양에 골프장이나 있습니까?”
나의 말투에 안내원은자존심이 상했는지 떠벌리기 시작했다.
“평양 골프장은 최고급입니다.”
“칠 수 있습니까?”
안내원은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더듬거리며 얼버무렸다.
“상부에 알아보고 연락 주겠습니다.”
“비용은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일부러 너스레를 떨었는데 무척 난처해하는 표정이었다. 상부에서 허락이 났는지 다음날 아침에 벤츠 190형 차량이 나왔다. 운전수 2명, 안내원과 우리 일행 이 탑승했고, 차량은 평양 남쪽으로 달렸다.
차창으로 들녘에서 풀을 뜯는 농민들이 보였다. 평양 외곽에는 낡은 트랙터가 녹슨 채 방치되어 있고, 한 섬도 안 되는 옥수수를 열댓 명의 농부들이 타작을 하고 있었다. 극도로 나쁜 북한의 식량사정을 엿볼 수 있었다. 평양 시내에서조차 상점은 보기가 힘들었다. 통제경제에 의존하다 보니 북한의 경제난이 가중되고 있는 현실이다.
중국 상해나 베트남의 호치민시는 시장을 일부 개방해서 외자유치를 하면서 경제부홍을 꾀하고 있다. 북한만 폐쇄정책을 고수하면서 주민들을 기아 속으로 몰아넣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클럽하우스에 불이 꺼져 있었다. 우리 일행이 가니 그제야 불이 켜졌고, 사용할 사람도 우리 네 명이 전부였다. 골프장이 그저 ‘접대용’으로 보였다. 페어웨이의 잔디는 깎은 지 오래되어 보였다. 골프채는 중고 일본제 혼마였다. 직원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조총련계 프로 골프 아오끼 선수가 골프장 건립에도 일조했다고 한다.
나는 기념으로 모자를 하나 샀다. 영어로 PGJ라는 마크였는데, 약자가 평양골프장이라고 해서 한바탕 웃은 적이 있다. 캐디에게 팁을 준 사건(안내원이 공을 주우러 간 사이에 몰래 주었다)으로 인해 17번 홀에서 골프가 끝나버렸다.
아마도 팁을 받은 것이 문제가 될 것 같아서였는지 캐디들은 이미 사라져버렸다. 북한에서 팁에 대한 문제는 굉장히 예민해했다. 우리 일행은 성의를 보이느라 싶어서 주었는데 고려호텔에서도 여직원이 팁을 돌려주기 위해 찾아오기도 했다.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께서 모든 것을 풍부히 주시는데 팁은 받지 않겠습니다.”
아마도 상부로부터 그런 하명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아쉬운 작별, 우리는 한겨레
오후에는 김일성 광장에서 열린 ‘아리랑’ 축제를 관람했다. 수만 명의 인원이 동원된 대집단체조와 예술 공연을 결합시킨 독창적인 형식이었다. 그 규모가· 놀랍고, 대 인원이 기계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은 감탄할 정도였다.
하지만 북한에서 느끼는 한 가지는 아리랑 축제가 끝나자 바로 모든 관중들이 금세 사라져 버 린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봉수교회 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잘 짜인 찬양대 공연과 설교가 끝나자마자 자리를 꽉 메운 신자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한꺼번에 사라져 버렸다. 인사 한 번 나눌 겨를도 없이 마치 마술사들이 커튼을 들치면 무언가가 없어져 버리는 마술쇼처럼 모든 것이 연출되어 움직이는 것 같아 보였다.
자연스럽게 인민들이 살아가는 현장을 볼 기회도 없고 아무나 만날 수도 없이 통제가 되어있어 거대한 전시관에 갇힌 느낌이었다.
북한 방문 마지막 날 안내원을 했던 김희찬 씨도 그를 감시하는 제3의 인물을 의식해서 제대로 말을 하지도 못 했다. 그도 역시 같은 민족이라는 끈끈한 형제애가 흘러서인지 4박 5일 동안 정이 들어 떠나는 우리 일행을 아쉬워했다. 북한 체제 속에서 굳어진 것이겠지만 기계 같던 그의 첫인상은 짧은 일정의 방문에서 어느새 기억이 나지 않고 형제 같은 우애를 느꼈다. 그러니 나 역시 작별하려니 마음이 무거웠다.
김 씨는 자신에게 집중된 감시가 허술해진 사이 급히 고려호텔 로비에 놓인 전표 한 장에 잽싸게 주소를 적어 나에게 전해 주었다.
“서로 연락을 주고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나는 한참이나 어깨를 부둥켜안았다. 괜스레 콧등이 시큰해졌다. 같은 민족이면서 서로 적대하면서 살아온 세월 동안 우리는 너무나 서로를 모르고 살아왔다는 것을 느꼈다. 그들도 우리의 형제이고 자매이다. 기근과 경제난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북한 형제들을 두고서 풍족한 자유의 땅, 미국으로 떠나는 발걸음이 무겁고 죄스러웠다.
그와는 마지막 만남이 될지도 모른다. 북한 방문은 통일이라는 과제를 다시 한 번 생각게 하는 귀한 시간이 되었다, 안내원들이나 호텔 종업원 모두가 친절하고 인정 있는 한민족이었지만 그들 모두가 체제 속의 희생자로 자유 없이 살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비로소 나는 부모님의 고향에 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곳에도 우리처럼 가슴 따뜻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떠나는 가방을 꾸리기 시작했다. 평양을 떠나는 차창에서 손을 흔들며 환송하는 그들을 보면서 나도 몰래 한줄기 눈물이 흘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