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사스시티 다운타운에서 가게를 오픈할 자리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가게를 시작하기 전에 은행 대출(Bank Loan)을 받기 위해 퍼스트 내셔널 뱅크(First National Bank)의 문을 두드렸다. 나는 지점장에게 말했다.
“동양 가게를 오픈하려고 하는데, 은행대출을 받고 싶습니다.”
백인 지점장은 지역에 동양 가게가 없다는 것을 간파했는지 운영자금을 대출해주며 사업을 시작하도록 도와주었다. 또한 다운타운 12번가 가게 건물을 빌릴 수 있도록 빌딩 주인을 만나 주선을 해주기도 하고, 가게가 자리를 잡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었다.
임대의 조건은 월세를 디파짓(Secutity Deposit, 일종의 보증금)으로 내면 된다고 했다. 월세는 250달러였다
1968년 내 인생의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었다. <Kim-Bo Im port Co.(金寶商社)>란 가게 이름은 아버님의 ‘금화기업’의 유업을 이어보려는 뜻도 있었다. 당시 번화가였던 12번가를 따라 그랜드 블르버드 (Grand Blvd) 거리에 위치한 건물에 1,000 스웨어피트의 점포를 차렸다. 맞은편의 빌딩은 The Palace of Clothing Co.가 자리해서 옷가게가 있었다.
오픈하기 전에 일본인 친구인 대학교 동창 티노가 유리창에 직접 붉은 페인트로 ‘복(福)’ 자를 썼고, 홍 사장이 추천한 도매상에 외상으로 물건을 주문해 진열하고, 밀워키에서 싣고 온 샘플로 윈도우를 장식했다.
다양한 종류의 동양 선물용품(Oriental Gifts)를 취급했고 도매와 소매를 겸했다. 지역에 동양 가게가 없었기에 손님들이 하나둘씩 호기심 어린 눈으로 찾아오기 시작했다. 영화에서나 보던 동양의 이국적이고도 신비한 디자인이나 컬러에 매료된 이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매출이 늘어났다. 복(福), 희(喜)라고 쓴 종이등(紙燈) 같은 제품도 꽤 잘 팔렸다.
놀랍게도 며칠 지나지 않아 물건이 동이나 다시 주문을 몇 배로 했다. 특히 눈썰미가 좋고 영특한 아내는 새로운 아이디어 상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중국 대나무 문발을 얇게 잘라서 대나무 반지(Bamboo Ring)를 만들어서 선보였다.
아내의 친절과 새로운 상품에 대한 소비자의 반응이 좋아서인지 백 개를 만들어 놓으면 그날 재고가 없을 만큼 인기를 끌었다. 가게에 손님이 몰리면서 종업원도 두 사람 더 고용했다. 홍콩에서 비취 알이나 상아 제품을 수입했고, 로드아일랜드에서 부품(Jewlery Findings)을 주문해서 목걸이, 귀고리, 반지를 제작했다.
다양하게 디자인한 액세서리도 만들어 팔았다. 그중 아프리카 스타일의 목각인형을 펜던트 형태로 하는 아이디어는 아내가 제안했다. 가죽 벨트를 만드는 회사에서 절단하고 버린 가죽 줄을 가져와 목걸이 사이즈로 잘라 목각인형, 티키(Tiki)를 매달아서 전시를 했는데, 흑인들이 하나둘 사기 시작하면서 우리 가게의 히트 상품이 되었다.
새로운 아이템으로 홍콩에서 수입한 상아를 원료로 복(福), 애(愛) 같은 한자를 새긴 상아 목걸이를 만들었는데 그 역시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한국에서 수입한 것으로는 박격포탄으로 만든 자개 화병이 있었다. 전후의 한국에서 고철 포탄피에 자개를 입힌 특이한 제품이었다.
미국에서는 I960년대 초부터 가발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한국의 가발 산업은 초창기엔 인모제품으로, 그것도 수제품이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기계제품이 나오면서 정부의 가발산업지원정책에 힘입어 수출의 물꼬를 트게 되었다. 이후 합성섬유 카네칼론(Kanekalon)이 개발되면서 1970년대 초까지 미국에 가발 수출은 한국의 주력산업이 되었다.
한국에서 생산한 인조 가발은 가격이 매우 저렴했기 때문에 흑인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70년대 초에 한국산 인조 가발을 파는 한인 가게가 저소득층 흑인 동네를 중심으로 많이 들어섰다. 이후 한국 상인들이 흑인 가발 시장을 독점하게 되었는데 가발이 한국에서 수입되었기에 상품 확보에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 주류 상인들은 흑인 시장의 구매력을 무시하면서 가발 시장에 뛰어들지 않았다.
가발이 소비자 구매 핫 아이템으로 자리 잡자 나는 12번가 금보상사에서 북쪽으로 한 블록 정도의 거리에 두 번째 가게로 가발 소매점인 ‘KBI Wig’를 차렸다.
때마침 한국에서 우성무역의 김태복 씨가 미주지사를 설립하려고 이곳에 왔다. 고교 후배이기도 한 그와의 우정은 사업으로 이어졌다. 예상했던 대로 수요는 폭발적 이었다. 나는 태국 유학생 찌드라를 가게 매니저로 고용해 본격적인 가발 장사에 나섰다. 인조 가발의 머리칼을 여러 형태로 빗겨 전시해두면 금세 동이 날 정도로 잘 팔렸다. 이렇게 하여 나는 초보지만 조국을 위해 무역구국의 길을 실천해 나갈 첫발을 떼었다.
손님이 더욱 늘어나서 가게를 하나 더 오픈했다. 그래서 공예품 가게와 두 개의 가발 가게, 그리고 식품점 등 4개의 가게를 운영하게 되었다. 가게마다 매니저를 두고 아내는 부동산 에이전트로 일하며 가게 운영을 도왔는데 가게의 매상을 정리하고 필요한 것은 직접 구매하기도 하면서 일손을 거들었다.
I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인들의 경제활동은 미미했다. 베트남 전쟁을 계기로 미국정부의 이민 문호 확대법이 실시된 1968년 이후부터 가난을 벗어나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던 한국인의 집단이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1970년 초에 독일로 취업을 갔던 광부들과 간호사들도 대거 미국으로 이주해 왔다.
LA의 경우, 1972년 대한항공의 취항으로 한인 인구가 늘어나며 올림픽가 주위를 중심으로 코리아타운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특히 1970년대 들어 한국 정부가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본격 시행하면서 뉴욕에도 한인타운이 된 맨해튼 브로드웨이 32가를 중심으로 가발과 잡화 등을 수입해 파는 서울통상 등 수입상들이 늘어났다는 얘기를 사업을 하는 지인들에게 들었다.
본격 이민 초기, 미주의 한인들은 고향을 잊지 않고 내 나라, 내 조국이 잘 사는 길이라면 가발일망정 사방을 누비며 팔아 달러를 보냈다.
캔사스시티도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이민자들이 서서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인 인구가 늘어나 39번가 Main St.에 ‘금보동양식품(Kim-Bo Oriental Food)’을 차렸다. 초기 유학생들에게 가장 힘든 것이 영어가 아니라 음식임은 외국에서 생활한 사람들은 누구나가 공감하는 사실이다.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처럼 한국인의 체질에는 한국 식품이 최적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한국인들은 김치나 된장 같은 발효식품을 먹어야 체질이 정상적으로 유지가 되는데 미국 음식만 먹다 보면 느끼한 맛에 식욕마저 잃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중국집에 가끔 들러 간장소스가 들어간 중국음식이라도 먹어야 느끼해진 입맛이 어느 정도는 개운해지는 느낌이었다.
사업이 안정기로 접어들자 나는 그간 액세서리 주문을 통해 무역거래를 하고는 있었지만 무역 규모를 더 키우고 싶어졌다. 소매업으로는 무역구국이라는 큰 그림을 담을 수 없다는 생각에 새로운 도전을 감행하고 싶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