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리 주 캔사스시티 (KansasCity)는 미주리 강과 캔자스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다. 캔사스 주 영역의 캔자스 시와는 행정상 나누어져 있지만 경제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중부의 중추적인 도시로 성장해온 곳이다. 서부 개척을 위해 서진하는 개척자들의 장비와 필수품을 공급했던 중심 지역으로 발달했기 때문이다. 흔히 조랑말 우편배달(the Pony Express)로 유명한 파익스 픽 마구간(the Pikes Peak’s Stables)이 유래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한국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지닌 투르먼 대통령과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한 지 이틀 만에 백악관 안보회의를 소집하여 바로 참전을 결정했던 트루먼 대통령을 기리기 위해 그의 고향, 미주리 주 인디펜던스 시 (Independence, MO)에 트루먼 기념관이 세워졌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의 총사령관으로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하였고, ‘아이크(IKE)’ 란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1952년에 공화당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한국전쟁 휴전조약을 끌어낸 장본인으로서 I960년 한국을 방문했다. 미국의 대통령 신분으로는 최초로 한국을 방문한 것이다. 캔자스 애벌린 시(Abilene, KS)에 대통령 기념관이 있다.
나는 우선 파크빌(Parkville)에 위치한 파크 대학의 ELI 과정으로 입학했다. 1875년에 개교한 기독교 계통의 사립대학인지라 캠퍼스 내 건물들은 아주 고풍스러웠다. 첨탑인 교회처럼 웅장하게 보이는 본관 건물인 맥케이 흘(Mackay Hall)에서 학생등록을 했다.
이곳 학교 동문 가운데 한국인으로는 연희대학교(현 연세대) 초대 총장을 역임했던 백낙준(1895-1985) 박사가 1918년에 입학해 1922년에 졸업을 했다. 그 후 예일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에 캔사스시티로 돌아와서 캔사스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파크 대학에서 초빙교수를 한 적이 있다. 내가 한국을 떠날 그 무렵 서울시 제5대 참의원을 지낸 것으로 알고 있다.
재미 대한민국애국부인회(근화회)를 조직한 여성 독립운동가인 김마리아(1891-1944) 여사는 1923년에는 미국 유학길에 올라 파크대학교를 다닌 동문이다. 안창호 선생이 “김마리아 같은 여성이 열 명만 있었다면 한국이 독립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한 유명한 일화도 있다. 일제 강점기에도 캔사스시티 지역으로 많은 유학생이 오게 된 것은 서재필 박사, 안창호 선생 등 민족 지도자들이 이 지역을 방문하여 유대관계를 맺어왔기 때문이었다. 1945년 영락교회를 설립한 한경직(1902-2000) 목사가 1926년에 엠포리아 대학(Emporia, KS)을 졸업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언덕배기에 있는 본관 건물 뒤로 벽돌 건물인 Copley-Thaw Hall 기숙사 2층을 배정받았다. 교내식당인 카페테리아에는 한국에서는 보기가 힘든 바나나와 오렌지가 바구니에 가득 담겨 있었다.
4·19 당시 이기붕 부통령 가택을 수색했을 때 바나나가 나왔는데 그것이 국민감정을 더욱 자극했던 일이 있다. 서민들은 감히 먹지도 못하는 귀한 과일인 바나나 한 관이 쌀 반 말 값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4·19 혁명은 부정선거라는 대의명분에 따른 시위였지만, 더 근본적 인 원인은 서민들의 어려운 현실을 외면했던 정부의 교만과 실정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극에 달해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당시 쌀 한 봉지 사서 연명해야 했던 서민들에게 바나나는 사치의 상징 일 수밖에 없었다.
바나나가 수북이 쌓여 있는데도 먹는 학생들이 별로 없었다. 공놀이하듯 오렌지를 서로 던지고 받으면서 장난을 하고 있었다. 생김새로 보아서는 오일머니를 자랑하는 중동의 사우디아라비아나 쿠웨이트 등지에서 온 학생들로 보였다. 그들은 고급 자동차를 몰고 다녀서 보기에도 부유층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을 보며 주눅이 들지 않으려고 애썼다. 세면장 거울 앞에 서서 외쳤다.
“대한국인 김영렬이 왔다!”
그리고는 손바닥을 거울에 찍었다. 대한국인 안중근 의사처럼. 그리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의 등장인물 라스띠냐크처럼 독백했다. ‘캔사스시티여! 이제부터 너와 나의 대결이다.’
그날 저녁 바나나 한 관을 혼자서 다 먹었다. 마치 황금 덩어리를 먹는 기분이었다. 한국에서는 하도 귀한 과일이라서 특별 손님 접대용이었다. 그런 바나나를 실컷 먹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마음껏 귀한 과일을 먹을 수 있는 이곳이 천국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미국에서의 첫날이 행복했다.
그날 밤 내내 잠을 잘 수 없었다. 너무 많은 황금 덩어리를 먹은 탓이었다. 배가 더부룩했고,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배나 사과에 비해 별맛도 없는 과일인데 한국에서는 이다지 귀한 대접을 받는가 하는 생각이 드니 괜히 화가 나기도 해서 욕심껏 먹었던 것 같다.
바나나 때문에 잠을 설치며 많은 생각에 잠겼다. 상해 임정 요원들은 중국에서 조국을 되찾으려고 역경 속에서 살아왔다. 막상 광복이 되자 중경에서 철수해 조국으로 귀국할 때는 정부가 아닌 개인자격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김구 주석 등 임정 요원들의 가슴 아픈 역사, 그리고 1949년 경교장에서 안두희에게 저격당하여 타계하기까지의 삶을 보면서 민족의 성패는 지도자에게 달려있는데, 한국사의 어두운 이면은 훌륭한 지도자를 지켜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김구 선생과 우리 집안과의 인연 때문인지 안두희에 대해 분노가 일기도 했다. 그러나 용산고 내 급우가 그의 아들인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동창인 안 군은 부친으로 인해 마치 연좌제에 묶인 둣 억울한 인생을 산 인물이다. 훗날 안 군 부부가 우리 집에 와서 임정 시절 김구 주석 이 아버님께 하사하신 ‘무역구국’ 현판을 보는 순간에 낯빛이 창백해진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러고는 서둘러 떠났다. 역사라는 것은 어쩌면 지울 수 없는 업보일 수도 있다. 동창이 부친의 죄로 인해 평생을 역사의 죄인처럼 숨어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나 개인은 그를 용서할 수 있지만 역사는 바로 쓰여야 한다. 진실이 은폐되고 왜곡되는 것은 나로서도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정권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이기붕과 바나나 사건도 있었지만 내 생각으로 이승만 대통령은 외국에서 수입되어 엄청나게 비싸지만 우리 실정에 안 맞는 바나나라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미 군정의 입장에서는 애국지사이면서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영어를 잘하는 이승만 박사 쪽이 김구 주석보다는 대화 상대로서 훨씬 편했을 것이다.
편리성과 합리적인 기준만 따지면 골치 아픈 광복 이후의 한국이나, 휴전 이후의 한국은 강대국인 미국과 소련의 거래 속에서 두 동강이 나고 민족은 이념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강제로 지리적 분단이 되어버렸다. 한국의 불행한 역사는 어쩌면 지도자들의 잘못된 판단과 선택 때문이었다. 좋은 지도자를 배출할 수 없다면 민족의 장래는 암담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날 저녁 배탈 사건 이후 바나나를 멀리했다. 파크 대학 내 영어 과정에는 전 세계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ELI 학장이 한국인 배영 박사였다. 독립군의 후손이자 부친이 목사였던 관계로 해방 전에 미국으로 와서 학위를 받아 미국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몇 안 되는 자랑스러운 한국인 중의 한 분이었다.
미국에서의 첫 대학생활은 순조로웠다. 기숙사는 2인 1실이었다. 라디에이터가 창문 쪽에 있고, 양옆으로 침대 두 개가 놓인 작은 방이었다. 미국인 친구가 룸메이트였다. 그곳에서 사귄 일본인 친구 구로도 씨는 체육관에서 유도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훗날 정치인이 되어 일본 중의원을 지냈다.
국제학생회가 주최하는 나라별 전시회에서 나는 배영 학장 부부의 도움으로 병풍, 인형, 화병 등을 전시했고, 국제학생들에게 한국을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되어 무척 이나 기뻤다.
나는 Park College에서 1년간 공부한 후 친구 임창빈이 다니던 CMSC(Central Missouri State College, 현재는 UCM:University of Central Missouri로 변경)로 편입을 해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