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한 길을 뚜벅뚜벅 걸어온 사...

박찬숙(방송인)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지리산에 방사한 반달곰 한 마리가 위치 추적용 발신기 교체를 위해 보호받던 중 탈출했다. 2003년 11월 27일 언론에 도배된 뉴스였다.

지리산에 자연적응 실험 중이던 만 34개월짜리 방사곰이 탈출했다는데, 목 부위에 상처가 나서 치료 후 다시 놓아 기르려고 발신기를 제거한 이후 전남 구례군에 있는 보호시설에 보호하던 중 시설의 땅바닥을 파고 탈출했다는 것이다.

2001년 9월에 놓아기른 뒤 50여 킬로그램에서 114킬로그램으로 늘어난 반달이 뉴스는 우연하게도 이종덕 사장에 대한 원고청탁을 맡은 날 터졌다. 왜 그랬을까. 반달곰뉴스를 보는 즉시 이종덕 사장이 떠오른 것은, 지금은 교수 직함이지만 예술의 전당 사장, 세종문화회관 사장이란 오래된 직함이 아직도 익숙하다.

1971년 남과 북은 방아쇠에 손가락을 얹어놓고 있는 긴장된 사이였다. 물론 지금도 적과 동지라는 상반된 개념의 존재로 통일로 가는 발걸음에 신중성과 지혜가 요구되는 것은 변함없지만, 그 당시는 북과 빨갱이가 너무도 무서운 존재로 인식돼 서로 오고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남북 적십자회담이 열린다는 뉴스는 국민들에게 커다란 충격과 동시에 곧 이산가족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금방 통일이라도 될 것 같은 흥분을 주었다.

이종덕 문화공보부 계장, 공무원인 한 사람을 병아리 아나운서가 만났다. 한국의 집에서 북한으로 떠나는 우리 적십자 대표단의 성공을 기원하는 공연을 위해서였다. 적십자대표단으로 떠나는 분들의 역사적 소임, 국민들의 넘치는 기대감으로 김강섭 악단의 연주도 흥보다는 비장감마저 감돌았다.

이종덕 계장, 그는 앞으로 나서지 않고 뒤에서 그 일을 조율하며 남북 적십자회담이 가지는 역사성을 그날 밤 적절하게 만들어냈다. 그러나 병아리 아나운서인 나는 그 사실을 나중에 알았고 그가 단순한 심부름꾼인줄 알았다. 이런 일은 박정희 대통령 취임 축하공연을 지금은 세종문화회관이라는 이름으로 거듭난 당시 서울시민회관에서 있었던 몇 번의 공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 대통령 취임 축하공연. 우리나라에서 공연되는 최고의 무대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을 진행하는 동안 큰 잡음 없이 공연이 마련되었고, 끝나고 나면 흠 없이 완벽하게 잘된 공연이었다. 나는 그중 사회라는 작은 역할을 했지만, 누군가 기획부터 섭외, 허드렛일까지 도맡아 하는 봉사자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처럼 공연기획, 무대문화 행정이란 개념조차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이종덕 계장이 공무원으로서 그 자리에서 그런 일을 시작한 것이 우리나라 문화행정의 시작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시절 같이 일할 때 나는 그의 모습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나서지 않고 지시하지 않고 저만치서 사람들을 도와주고만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공무원은 원래의 소임대로 봉사자의 위치로 많이 돌아와 있지만 30~40년 전의 공무원은 권위적이고 시혜자라는 우월적 착각에 빠져 있었던 때였기에 그의 태도는 인상적이었다.

▲ 박찬숙 [출처 ; 블로그 춘하추동 방송 / 이장춘]

몇십 년 후 예술의 전당 사장 시절이나 세종문화회관 사장 시절이나 수굿하고 부드럽고 친화적인 옛날 그대로의 모습에 변함이 없이 사람을 편안하게 해준다.

오랫동안 소식이 없던 이종덕 사장이 예술을 하는 좋은 사람들 모아서 로타리클럽을 만들자고 연락을 해왔다. 나는 모임에 익숙하지 않아 거절했는데, 몇달 후 예장 로타리에 와서 간단한 강연을 해달라기에 그것마저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 가게 되었다. 그의 문화예술계 지인들, 우리나라 문화예술계의 대표적 인물 40여명이 회원으로 활발한 활동하는 로타리클럽이 만들어져 있었다.

나의 강연이 끝나자 회장인 이종덕 사장이 이렇게 말했다.

“박찬숙 씨를 우리 예장로타리 회원으로 가입하기를 원하시는 분은 박수로 의사를 표시해주십시오.”

참 난처한 일이었다. 회원으로서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내 면전에서 안 된다고 할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회원 모두의 박수를 받고 거절할 상황이 못 되었다. 솔직히 이런저런 모임에 나가는 걸 내켜하지 않는 나지만 이종덕 사장의 작전에 나는 예장로타리 회원이 되었다.

그런데 회원이 되고 보니 회원으로서 활동보다는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교분을 나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나에게 마련된 것이었다. 사람들을 아우르는 힘, 큰 소리 나지 않게 보듬어가려는 노력, 그리고 40여 년 전 공무원으로 출발해 문화예술계 싹들이 거목으로 성장해 우리나라를 윤택하게 하는데, 밑거름이 된 이종덕 사장은 늘 이런 식이다.

이종덕 사장과 그 주변 문화예술계 인사들은 이제 오랜 우정을 나눈 피붙이 같은 동행이다. 또 그의 라자로마을 돕기 운동은 쉬지 않고 거르지 않고 소리나지 않게 가난한 사람들, 어려운 나환자에게 봉사하는 모범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그가 가장 사랑하던 외아들을 사고로 잃고도 아픔을 내색하지 않고 주위의 벗들과 라자로 환우를 돕는 일로 고통을 극복하는 삶의 자세는 많은 것을 깨우쳐준다.

어느 날인가 전화가 왔다. 낭만이 없어진 시대에 낭만적인 사람들을 모아 낭만파클럽을 만들고 낭만적인 생각이 사회에 넘쳐나도록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번에도 클럽이니 모임이니 이런데 나가는 게 계면쩍다며 거절했다. 각박한 세상 조직이나 체계적으로 단체를 만드는 게 아니라 자주 만나 내가 손해 보며 따지지 않으며 살자는, 그리고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게 낭만파 클럽인데, 당시 멋진 창립식을 치러 뉴스의 각광을 받기도 하였다.

나는 아직도 회원이 아니지만 따지지 않는다는 슬로건 때문인지 가끔 몇몇이 모임에 참석하곤 한다. 디지털시대에 아날로그적 생각이 남아 있는 게 예스럽고 멋스럽고 소중하다. 이종덕 사장은 그런 사람인 듯하다. 그런데 그런 변화를 몰라 언뜻 곰같이 미련해보이지만 철장 밑 땅을 파고 새로운 시도, 상황반전, 새로운 지향점을 향해 탈출을 감행하는 반달이 같다.

어느 날인가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단국대학교 문화예술 최고위과정 교수, 그가 젊음을 바쳐 해온 문화행정을 후학들을 위해 체계적으로 가르치고자, 그는 어느새 교수로 변신해 있었다. 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 느린 듯 하지만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의 모습은 아름답다. 그런 사람이 이종덕 사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