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 밑에서 주워왔을까?_3 (5)

걱정이 참 많으시겠어요

아버지의 가장 큰 특징은 ‘매사가 걱정’이라고 애기해야 할까? 우리나라의 경제에 대해, 산업에 대해, 미국의 정치와 영향력에 대해, 중동의 정세에 대해, 나날이 커가는 중국의 영향력에 대해 하루도 걱정하지 않고 지내시는 날이 없다. 워낙 지구의 부존자원인 석유를 근간으로 하는 에너지, 화학분야에서 일을 하셨기 때문에 요즘 사람들이 걱정하는 자원과 물 고갈문제에 대해 아버지가 걱정하시는 소리를 나는 30년 전부터 듣고 살았다.

중국이 기름을 때기 시작하면 지구상의 석유는 눈 깜빡할 사이에 바닥나고 지구는 망할 것이라는 얘기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하면서 끌어들이기 시작하면서 차관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제조를 등한시 하는 경제구조 때문에 국가부도사태가 날거란 애기를 IMF 외환위기가 터지기 20년 전에 나는 들었다.

엄마와 나는 “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매일같이 망한 나라에서 30년을 살아왔다”라고 농담하지만, 이 얘기는 사실 농담이 아닌 현실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걱정이 있으면 그 걱정을 덜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인간이다.

아버지는 끊임없이 걱정하셨고 끊임없이 노력하셨지만 연세가 드시면서 아버지가 다 이루지 못한 것을 후세들이 제대로 채우지 못하는 것을 보고 늘 안타까우실 것이다.

얼마 전 어느 은행장을 역임하셨던 분이 여주에 있는 아버지 도서관의, 자료를 보시고 “어이구, 이런 책들을 다 보셨으면 아버님께서 걱정이 많으시겠어요.”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곳에는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이코노미스트’ ‘아시안 비즈니스’ ‘오일 앤 가스저널’ ‘패트롤륨 케미스트리’ ‘내셔널 지오그라피’ 등 세계 경제와 자원, 석유화학에 대한 자료들이 연도별로 영인되어 정리되어 있었다.

그 분 말씀을 듣고 “어쩌면 그렇게 잘 아세요? 정말 놀랍네요.” 하고 말하면서도 한 눈에 아버지를 알아보신 그 분에 비해 50년을 넘어 옆에 살면서도 아버지를 그만큼 알지 못한 나 자신이 못나게 느껴졌다.

유별난 정리벽

우리 식구들은 누구나 다 아는 애기지만 아버지에게는 몇 가지 평범하지 않으신 버릇이 있으시다. 하나는 물건을 버리지 않는 버릇이고, 하나는 유별난 정리벽이다. 엄마기 입버릇처럼 하시는 말씀이 있다. “우리 집은 책 때문에 이사를 못가요.”다.

다 오랜 살림집들이 대개 그렇겠지만 신교동 집에는 외할머니께서 쓰시던 살림살이가 아직도 그대로 있고, 아버지께서 60년대부터 모아오신 전공서적들과 잡지, 그 밖의 자료, 앨범, 신문기사 스크랩, 엄마 전공서적, 우리들이 보던 책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물건에 깔려서 사람이 이고 살아야 할 만큼 많은 물건이 있지만 그 어떤 것도 마음대로 버리면 안 된다.

그런데도 놀라운 건, 집이 낡고 구숭숭해도 말끔히 정리되어 있어서 지저분하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이건 아무리 봐도 엄마의 정리 솜씨는 아니고 사업을 접고 작은 사무실에서 계속 일을 하시지만 시간이 많아지신 아버지 작품임에 분명하다.

▲ 필자는 항상 연구하고 국가를 생각하며 통섭적으로 생각했다 (1977. 8.1.)

아직도 기억나는 일 하나는 내가 대학교 다니던 시절, 아버지께서 동생에게 책을 한권 가져오라고 심부름을 시키셨는데, 책 이름과 함께 그 책이 어느 서가에 위에서 두 번째 칸, 왼쪽에서 첫 번째 칸, 몇 번째에 꽃혀 있노라고 하신 일이다. 그 많은 물건과 자료를 버리지 않으시는 대신 그 물건의 존재를 잊지 않고 나름의 분류체계를 구축하여 그 물건들의 좌표가 일일이 입력되어 있을 아버지의 머릿속은 대체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하다.

우리 가족들이 식사 후에 초콜렛이나 가지런히 상자에 담겨 있는 과자 혹은 한과를 먹을 때 또 한 가지 진풍경이 일어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대충 좋아하는 것들을 골라먹고 이가 빠진 채로 상자를 덮어 보관한다. 하지만 아버지와 함께 앉아 그런 것들을 먹을 때 꼭 마지막에 빠진 칸에 남아 있던 과자들을 옮기고 줄에서 몇 개 남는 것이 있으면 그걸 다 먹어 치울 때까지 식탁을 떠날 수 없다. 왜냐하면 상자 안에 나머지 줄은 꽉 찼는데, 한두 개 남아 있는 과자를 절대 두고 못 보시는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이다.

바로 지난 주에는 초콜릿을 먹다가 우리가 아버지를 보고 웃으면서 이 빠진 초콜릿을 정리해 넣었다. 우연찮게 하나도 남는 것 없이 깔끔하게 정리된 초콜릿 상자를 보시며 아버지 하시는 말씀, “이러면 먹을 게 없잖아?”

이제는 안다

세월이 지나고 아버지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게 되면서부터 사실은 무서운 아버지 속에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을 요즘 깨달아 간다. 이런 저런 것들을 알기도 전에 아버지를 제 마음대로 휘두른 유일한 사람이 있었다면 그건 우리 아들이었던 것 같다.

손이 귀한 집안에서 태어난 첫 손주라 특별히 귀여워해주셨던 것도 있고, 녀석이 밉상인 어른으로 다 자라지 못하고 안타깝게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탓도 있겠지만 아들을 쳐다만 보시고도 벙글벙글 웃으시며 좋아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참 좋아보였다.

아들 덕에 아버지와 얘기하는 시간도 빈도수도 늘어났던 것 같고, 손주를 예뻐하시는 정다운 아버지 모습에서 내가 자라면서 느끼지 못했던 아버지의 마음을 느낄 기회가 더 많았던 것 같다.

몇 년 전부터 귀가 잘 들리지 않으셔서 거의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의사 전달이 잘 되지 않는 상황이라 아버지와의 의사소통은 다시 예전 수준으로 돌아갔지만 50년 넘는 세월이 내게 알려준 아버지의 사랑하는 마음을 이제는 다 안다. 한 구석도 닮은 곳이 없었던 내 안에서 가끔씩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버릇들이 하나 둘 발견될 때 나는 생각한다. 난 절대 다리 밑에서 주워온 딸이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