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 밑에서 주워왔을까?_1 (3)

전송미 | 셋째 딸

어려서 내가 제일 듣기 싫어했고 무서웠던 얘기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소리였다. 물론 어린아이가 어른들이 하는 소리가 농담인걸 알리도 없었고 내가 가족들과 한 핏줄이 아니고 외톨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무서워서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하지만, 좀 더 구체적인 원인을 분석해보면 아버지와 내가 너무나도 닮은 구석이 없어서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요즘 대기업에서 직원들의 성격과 이에 따른 적성, 행동방식을 평가하는 MBT(The Myers Type Indicator) 테스트라는 것이 있는데, 만약 아버지와 내가 동시에 이 테스트를 받는다면 모든 카테고리에서 정 반대의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할 만큼 아버지와 나는 닮은 구석이 없다.

아버지의 철두철미한 계획성과 부지런함에 비해 나는 너무나도 즉흥적이고 모든 일을 데드라인 까지 미루어놓고 벼락치기로 처리하는 편이다. 매사에 조심스럽고 분석적이고 생각이 너무 많아 계획과 정리정돈에 하루의 3분의 2를 보내시는 아버지에 비해 나는 닥치는 대로 저지르고 말고, 안 되면 말면 되고, 모든 일은 다 잘 될 수밖에 없다는 근거 없는 믿음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매사에 지나치게 낙천적이다.

물론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오랜 얘기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어려서 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다른 성격의 사람을 보면 어린 나이에도 나와 다르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자라면서 내가 아버지와 닮은 구석은 하나도 없을지 몰라도 적어도 엄마를 80% 이상 닮았다는 것, 엄마가 훌륭한 여성이며 학자이고 존경받는 교수님이란 사실을 알아내고부터 아마 다리 밑 설화는 내게 더 이상 무서운 얘기가 아니게 되었던 것 같다.

가장 큰 유산, 교육

사실 아버지는 그리 가정적인 분이 아니셨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영문과 대학원을 1년 만에 그만두고 인테리어로 전공을 바꾸겠다고 폭탄선언을 할 때까지 아버지와 3분 이상 대화를 나눈 기억이 없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대화를 이끌어갈 능력이 없는 사람이 아버지와 얘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친구들이 아버지와 많은 얘기를 나누고 가까운 관계를 유지한다는 얘기를 들으면 도대체 그 관계는 어떤 관계일지 궁굼해 질 만큼 아버지는 내게 멀고 어려운 분이셨던 것 같다.

영문과 대학원을 그만두고 인테리어 디자인 공부를 하겠다고 말씀 드렸을 때 생전 처음 아버지가 나 때문에 화내시는 모습을 보았다.

한 국가의 기간산업을 일으키시고 이로써 경제를 발전시켜 한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는 일에 평생을 바치셨던 아버지의 눈에 디자인이라는 분야가 얼마나 시원찮아 보였을지, 지금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그때는 아버지가 많이 원망스러웠다.

▲ 1998년 가나화랑에서 셋째 딸 송미 가족

어쨌든 고집을 피우고 생떼를 쓰는 우여곡절 끝에 그런 분야를 공부하고 싶으면 건축을 하라던 아버지의 말씀을 듣지 않고 내 뜻대로 인테리어 공부를 해서 지금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지만, 가끔 아버지 말대로 건축을 공부했으면 지금같이 ‘업자취급’을 당하고 억울해하는 일은 적어도 없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마음에 차지는 않으셨겠지만 아버지는 당신께서 우리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은 교육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평생 전문적인 직업을 가지고 여자이지만 자신의 세계를 가질 수 있는 직종이라 생각하셨는지 인테리어를 전공하는 내 유학길을 허락해 주셨다.

이 세상을 이끄는 모든 리더들은 그들이 지향하는 목표에 집중하고 정진하느라 주변을 돌볼 겨를이 없고 사뭇 독선적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고 있는 바가 너무 확실하고 추구하는 목표가 너무 뚜렷하기 때문에 가족이나 사회에, 그리고 주변사람들에게 친화적이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아버지 역시 한시대의 선구자이셨고 한국의 경제를 어깨에 짊어진 분이셨기 때문에 잔정이 많고 표현이 풍부한 분이 아니셨다.

나이가 들어 자식을 가져봐야 부모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이 있듯이, 자식의 앞날에 대한 걱정은 이 세상 모든 부모의 걱정일 것이고, 아버지 역시 금지옥엽 키우셨던 딸이 부잣집 마나님들 손가락 끝에서 돈 몇푼에 휘달려 인간적인 모멸을 느끼며 살지 않기 바라시는 마음을 역정으로 표현하셨을 거란 생각을 지금은 할 수 있지만, 이렇게 말씀이 없으신 아버지를 젊은 나이에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자식 사랑

아버지는 여성의 사회 참여에 대해 일찌감치 앞서가는 견해를 갖고 계셨던 분이시다. 결혼하고 나서도 계속 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치신 엄마의 사회활동을 전폭적으로 지원하셨고, 우리들에게도 평생 자기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는 바탕을 보여주셨다. 아마 딸이 셋이나 되었으니 그 딸들이 모두 남의 집 귀신 되는 모양을 보고 싶지 않으셔서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런 마음이 없으셨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딸들을 시집보내기 싫어하고 아까워하신 마음은 아버지 방법대로의 자식사랑이지 옹졸한 자식에 대한 소유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또 한 번 아버지와 크게 부딪힌 일은,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겠다고 말씀드렸을 때다.

이 세상 어느 부모에게나 자기 자식은 제일 예쁘고 잘나 보이며 아깝다. 여기서 내 경험을 하나 얘기하자면, 우리 아들이 네 살쯤 되었을 무렵 미국에서 유치원에 다니던 때였다. 미국에 간지 얼마 되지 않아 말도 잘 안통하고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지 않을 상태라 아들은 자기보다 몸집이 큰 미셸이라는 여자 아이를 하루 종일 졸졸 따라다녔고, 방과 후에도 집에 데리고 와서 함께 놀며 시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