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 귀국, 그리고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별
1970년에 들어와서 MWK는 경영상의 이유로 5월에 본사를 뉴욕주 뉴욕에서 텍사스주의 휴스턴으로 옮기고 이를 계기로 저는 2년 5회에 결친 휴스턴 - 서울 및 뉴욕 - 서울 간 왕복생활을 마감하고 귀국하였고, 김정석 과장은 일을 좇아 MWK와 함께 휴스턴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저는 가족과 생활을 함께 하게 된 편안함 속에서 나프타분해시설 착공을 위한 준비 등으로 바쁜 가운데 부사장께 머지않아 닥쳐올 불행한 사태를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회사에서는 EP 올레핀과 별도로 촉진된 BTX 뱡향족화합물 공장이 2월 중에 준공을 보아 석유를 원료로 한 고급 BTX가 산업용 및 수출에 기여하게 되었습니다. 회사는 계속된 시설규모의 확장과 신규사업의 자금을 위한 자금의 조달을 위하여 걸프오일로부터 추가 증자 및 차관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아마도 오랜 예비접촉과 막후 협상을 거쳐 드디어 6월에 체결한 계획에 의하여 걸프오일이 회사의 주식 50%를 소유하고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회사의 장기적인 비전과 당시의 여건에 비추어 걸프오일의 역할증대는 불가피하였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으며, 다만 그 속에서도 회사와 한국 회사로서의 경영의 지속, 연속성 유지에 최소한 필요하였던 것은 내국인에 의한 경영권 행사이었을 것이라는데 이견이 없었을 것입니다.
중간 간부의 위치에 오른 제 판단에는 걸프오일이 경영권을 행사하는 회사의 수석 부사장(EVP)에 전민제 부사장을 지명하였다는 것은 그 소식으로도 회사의 직원을 위하여 마음으로부터 안위와 큰 기대를 갖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좋은 일에는 마가 끼는 것인가요? 부당한 모험과 기업적 판단이 아닌 경영외적 이유로 내국인 수석 부사장 지명은 국가원수에 의하여 감정적으로 거부되고 결정적 순간에 부사장께서는 낙마의 불운을 맛보시게 되었습니다.
수석부사장 지명을 둘러싸고 전혀 예상 밖의 진전에 당황한 걸프오일은 6월에 걸프오일 아시아의 힐 보닌을 서둘러 수석 부사장에 임시로 앉히고 8월에 걸프오일 캐나다에서 존 존 스토익을 수석부사장으로 볼러 오기에 이르렀습니다. 대 회사가 명실공이 외국인에 의한 경영으로 넘어가는 순간이었습니다. 누가 비애국적인, 비애사적인 우를 범하였는지는 후세의 판단에 맡기신 채로 부사장께서는 회사를 떠나셨습니다.
돌이켜보면 이당은 복잡한 걸프오일 내부의 정치나 권력다툼은 성공적으로 처리하시면서 왜 회사 내부의 근거 없는 모함이나 갈등은 봉합을 못하였는지, 또 모함세력과의 타협의 길은 전혀 없으셨는지, 지금도 억울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합니다.
1970년 - 이당 이후
회사가 속해 있는 산업 속에서 회사에 대한 비전과 전략을 가지고 그 시대의 정부와 대주주인 걸프오일과 함께 긴 항해를 할 수 있는 경력을 가지신 분은 회사 내에 이당 한 분뿐이었습니다. 선장을 잃은 배가 좌초를 하지는 않는다 해도 그 항로는 엄청난 변화를 겪고 말게 됩니다.
신임 EVP 존 스토익은 다행히 큰 덩치만큼 인격체였고, 재임 3년동안 나름의 경영 및 통제체제를 회사에 심는데 큰 역할을 하였으나 거대한 걸프조직 안에서 회사를 하나의 단위 운영회사로 만들어나갔습니다. 외국의 EVP와 함께 하는 회사의 사장직은 의례적인 자리로 바뀌어갔으며 일부의 회사 간부사원은 생존과 출세를 위하여 여려가지 부끄러운 행태를 보였습니다. 불행하게도 정신과 인격의 상실기간은 걸프오일 이후 시기까지는 어느 정도 지속되었습니다.
이당으로부터 얻은 학습효과로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었던 저 박종률의 행적은 앞에서도 종종 언급한 바 있으나 이당 이후에는 그 학습효과를 바탕으로, 그에 더하여 걸프석유화학회사를 통한 경험, 학습이 저의 경영능력을 키워나갔다고 생각합니다.
2년여의 해외근무 환경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존경하는 지도자를 중도에 잃은 충격 때문이었는지 저는 1971년 연초에 급성간염을 앓았고 3개월의 휴직기간을 통하여 악물치료를 받으며 체력을 회복하였습니다. 그 이후로는 다행히 건강하였습니다.
나프타분해시설 건설이 완결되면서 저는 1973년 1월 일단 회사를 떠나 걸프오일로 자리를 옯기고 GOCHEM 아시아지역 사무실에서 지역부사장 셜던 비-들을 보좌하며 3년 반 동안 여러 가지 경험을 하며 변화와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유공석유화학, 진해화학, 중국걸프플라스틱 등 5개 투자기업의 사업계획 및 재정보고 처리가 주업무였습니다.
걸프화학 내의 많은 동료 및 상사와의 업무를 통한 접촉은 유익하고 바람직스러운 것이었으며, 저를 미국적 사고를 가진 경영인으로 많이 변화시켰습니다.
또한 GOCHEM 본사에서 몇 년간 근무경험을 쌓고 귀국하면 좋지 않겠느냐는 제의(아내의 반대로 거절)를 받거나 한 차례였지만 걸프오일의 회장인 밥 도시가 서명한 업무수행평가 보너스를 수령하였을 때는 걸프오일의 보상, 인정체제의 일단을 경험하였습니다.
GOCHEM에서 많은 생산적 작업과 경험을 하였으나, 최대의 성과를 올릴 수 있는 투자기회를 걸프오일 사내 정치 때문에 놓친 것은 지금까지도 큰 후회와 교훈으로 남아 있습니다. GOCHEM이 확장정책(Goram Gulf Refing and Marketing Company의 현상유지 정책과 상반)을 결정하면서 유공석유화학사업의 분할을 통한 확장을 기도하였으나 성공직전에 한국걸프오일의 정치적 방해로 포기하였던 경험은 쓰라린 것이었습니다. 1975년도에 단독으로 나프타분해공장으로부터 하부계열사까지 대규모로 확장할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확장의 기회는 1987년에 와서야 어렵게 얻어집니다.)
저는 제 보스가 귀국함에 따라 업무를 GOCHEM 싱가포르 사무실에 인계하고 1976년 7월 회사로 복귀하였고, 1979년 11월 석유화학 사업부서 담당 부사장이 된 후 1980년 8월 걸프오일의 철수와 1980년 12월 (주)선경의 인수에 따른 한국경영체제로의 복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계속하여 1993년 말까지 회사와 우리나라 석유화학 산업의 발전, 성장에 한몫을 담당하면서 전문가로서, 경영자로서 생산적이고 보람 있는 업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이어 저는 1994년 회사의 자회사인 유공가스 사장, 1995년 회사 상근 고문, 1999년에 이르러 37년에 걸친 회사와의 긴 인연에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이당은 순수 및 응용화학 국제협회(IUPAC)의 화학과 기업위원회(COCI)에서 지도적인 활동을 해오셨습니다. 이당은 이 기구와 저와의 인연을 만들어 위하여 몇 차례 참여를 권유하셨으나, 제 영역을 벗어나는 활동영역으로 판단하고 뜻을 받들어 모시지 못했습니다.
- 후기 -
회고전 준비작업을 도와드리면서 전인터내셔널 사무실을 여러 차례 방문하였는데, 필요한 작업과 논의하는 시간을 빼면 이당과 나 교수께서는 무섭게 조용한 분위기에서 책이나 잡지를 읽으시거나 글을 쓰시는 것이었습니다. 끊임없이 연마하시는 두 분의 모습은 성스럽기까지 하였습니다.
사진 자료를 정리하기 위하여 여러 해 만에 신교동 자택을 방문하였는데, 외관이나 내부가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정다웠습니다. 저희가 댁으로 방문할 때면 항상 잘 대해주시던 외할머님이 안계셨지만, 그리고 집안에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뛰노는 소리가 들렸으면 좋을 터인데 하는 생각을 하여 보았습니다.
2009년에 옛 동료 몇 사람(김선동, 김진욱, 문동민, 윤진만)과 함께 경기도 여주에 있는 송남농원을 방문하였는데, 다시 방문하고 싶을 정도로 잘 꾸미고 가꾸어져 있었습니다. 내외분께서 많은 주말을 농장에서 보내시고 나 교수께서도 자주 방문하도록 초청하여 주시니 앞으로 많은 동료들이 격의 없이 방문하는 것이 즐거움일 것 같았습니다.
남한강을 내려다보면서 먹을 수 있도록 대접하여 주신 민물고기 매운탕과 식당은 탁월한 선택이셨습니다. 감사합니다.
2011년 1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