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12월 어느 날 신라호텔 커피숍에서 우리부부와, 김윤환 의원, 김정례 전 보사부장관이 모였다. 그 자리에서 여러 가지 토론을 한 후 두 김 의원은 YS 외의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헤어졌다. 지금도 그 장면이 눈에 선하다.
우리부부는 인간적으로나 심정적으로나 가까운 박태준 최고위원과 이종찬 의원 때문에 무척 고민을 했다. 남편은 박 대표를 형님같이 따르며 그분의 성품을 좋아했다. 이종찬 의원은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인데다 시동생과 동기이고, 부인은 나의 후배여서 아주 가깝게 지냈다. 그러나 이 의원은 아직 젊으니까 차기를 바라 볼 수 있을 것이고 박 대표냐, 김영삼 대표냐 하는 문제는 노태우 대통령의 결정에 따르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김영삼 대표가 민정계 의원들을 접촉하고 있다는 말이 들려왔지만 남편에게는 연락이 없었다고 들었다. 그러던 중 1992년 5월 4일 밤 남편은 지역구에 가고 없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받아보니 김 대표였다. 그 분과의 전화통화가 처음이여서 당황했으나 남편이 지역구에 가고 없다고 했더니 잘 부탁한다고 해서 “그럼은요” 라고 답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며칠 후 남편이 서울로 와서 그날 김 대표가 지역구로 전화를 했을 때 자기는 “노대통령의 결단에 따르겠다”고 응답했다는 것이다. 또 이종찬의원이 경선에 출마하기 위해 경북 대의원 서명이 필요하다고 해서 “반만 서명을 해준다”고 말했다고 했다.
후일 남편은 당시 이미 노 대통령이 김 대표로 마음을 굳혔다는 이야기를 김윤환 의원으로부터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당연히 김 대표를 지지한다는 말을 그렇게 표현한 것인데 김 대표가 자기를 오해했다고 안타까워했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김영삼 대통령 임기 5년간 그가 당과 정부 보직에서 소외되리라고는 우리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민자당에서 대통령 후보 경선을 하려면 도별로 서명을 받아야 하는데 이종찬 의원이 경북 대의원들의 서명이 필요하다고 했을 때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마침 당의 방침이 경선이 돼야 김 대표의 선출이 모양새가 좋다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김천, 금릉 선거구 대의원 가운데 일부만 서명을 하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종찬 의원은 최종 경선에 참여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김천지구당 대의원 전원이 분명히 김영삼 후보를 지지했다. 그 뿐 아니라 그 해 5월 14일 대구에서 경북대의원 연설회의에도 우리부부가 참석했다. 그 자리는 YS 지지자들의 모임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고려 밖의 일이 되고 말았다.
김 대통령 임기동안 그이가 홀대를 당하자 지역구의 참모 한사람이 당시 떠돌았다는 소문을 귀띔해 주었다. 김천의 한 연로한 장로가 중앙당 김 대표실로 가서 박정수가 이종찬 의원을 밀고 있다고 근거 없는 말을 한 것이 오해의 근원이 되었을 수 있다며 늘 문제를 일으키는 그 장로를 비난한 적이 있었다.
김천으로 김 후보가 전화했을 때 그이의 화끈하지 않았던 반응, 경선에 나올 수 있게 김천 대의원 일부가 이종찬 의원을 위해 서명을 했다는 것 때문인지 들려오는 말은 김 대통령이 “경선에서 제일 서운한 사람은 박정수와 정석모”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편은 최종 선거에서 우리지역이 최다 득표를 하면 그런 오해는 풀어질 것으로 본다며 가볍게 넘겼다.
당시 이종찬 후보의 불리한 점으로는 안기부 배경, 육사출신(노 대통령이 자기로서 군 출신 대통령이 마지막이 되기 바란다고 언급했음), 5공 정치인, 짧은 정치경륜 등이 지적되었다. 반대로 김영삼 후보에 대한 민정계 논리는 지난 2년 합당 덕분에 정치가 안정되었다는 점, 이용만 하고 버릴 수는 없다는 점, 경륜과 문민정치 실현이 국민의 여망이라는 점, 노 대통령의 신의 문제 등을 들어서 YS 지명이 순리라는 분위기였다.
김윤환 의원이 청와대에서 김옥숙 여사를 붙잡고 몇 시간에 걸쳐서 YS가 되어야 한다는 설득을 했다는 이야기, 청와대에서 박태준 대표에게도 대통령 출마를 종용했다는 이야기 등이 이때 쏟아져 나온 루머들이었다.
1992년 12월 22일 대통령 선거 결과 김영삼 42%, 김대중 34%, 정주영 16%로 김영삼 후보가 14대 대통령으로 당선됨으로써 헌정사상 첫 문민정부가 탄생했다. 모든 국민의 기대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컸다.
김영삼 대표가 후보로 결정되자 그 이뿐 아니라 나도 같이 지역구에서 선거운동에 열중했다. 김 후보가 김천에서 유세하던 날 김윤환 의원(허주)과 그 이가 김 후보를 가운데 세우고 단상에서 두 손을 번쩍 들어 보이는 사진이 있다. YS가 아무리 경선과정에서 나의 남편이 마음에 안 들었다 해도 그날 동원된 인원을 기억한다면 생각이 달라졌어야 했다.
대구 유세 때도 김천에서 수십 대의 버스로 가서 유세장을 메웠다. 나는 나대로 시장을 누비며 김 후보가 당선되어야 할 이유를 역설하며 다녔고 시, 군 새마을 부녀회장을 중심으로 교육을 시키기도 했다. 그들은 박정수를 좋아하니까 박정수가 지지하는 후보를 찍겠다는 말까지 서슴치 않았다. 그 결과 부산과 경남을 제외한 전국에서 김천·금릉 선거구에서 YS의 득표율이 1등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우리는 선거결과를 보고 김 후보의 오해는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고 오히려 “큰 상”을 기대했다. 지구당위원장 회의에서 김 후보가 “득표율이 높은 지구당 위원장에게는 큰 상을 내리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선거 후 YS에게 그이가 당당하게 “약속을 지켰습니다”라고 했더니 어쩐지 그 분이 시원치 않게 “네-”라는 반응만 보여서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이제 생각하면 나의 남편은 정치인 치고는 너무 순진했던 것 같다. 아니 김 대통령의 성품을 잘 몰랐던 것이다.
열심히 뛰어서 좋은 성적을 냈다는 그 결과 자체가 더 중요하다고 믿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후일에 알게 되었다. 김 대통령이 어떤 사람에게 박정수가 자기에게 비협조적이었다고 했다는 말을 듣고 우리는 기가 막혔다. 김천지구의 선거결과는 김 후보 자신의 인기만으로 얻은 것으로 생각을 했다면 오산이다. 솔직히 우리 지역구는 이종찬 씨 지지자가 많았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도록 보채는 유권자들을 설득하며 혼신의 힘을 다 해 선거운동을 한 우리는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다. 대구 유세장에서 우연히 김 후보의 아들 김현철 씨를 만났을 때 내 나름대로의 선거 전략에 대한 조언을 했으나 대수롭지 않게 대하던 그의 태도까지 머리에 떠올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