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IPU총회 참석
91년 4월 27일 그이가 평양에서 개최되는 IPU총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대표단장 자격으로 떠나는 날이었다. 우리 대표단이 입북했다는 뉴스를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떠나기 며칠 전 남북실무자간 합의사항에 수차례 차질이 생겨서 남쪽 실무진의 애간장을 태웠기 때문이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이때 이종구 국방장관의 북한 핵무기에 대한 강경발언이 나오자 북한방송은 IPU 단장이라는 자가 그러한 발언을 비호했다면서 맹비난을 했다. 남측 대표단의 입북거부 움직임마저 보여서 우리 쪽에서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그러나 다행히 판문점에서의 실무진간 접촉으로 문제가 잘 풀렸다고 했다. 그 당시에는 엄연한 국제회의인데도 우리 대표단의 입북문제가 간단하지 않았다.
12명의 국회의원(채문식, 박영숙, 박관용, 김광일, 정재문, 조순승, 김현욱, 도영심 의원 등)을 비롯해서 국회 사무총장 등 27명의 대표단이 8박 9일간의평양 국제의회연맹 85차 총회 참석차 분단 후 43년 만에 휴전선을 넘어 북한 땅을 밟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날 밤 국회대표단장인 남편이 채문식 의장과 박영숙 의원 사이에 서서 출발성명을 낭독하는 모습을 텔레비젼을 통해 지켜보면서 나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다. 비로소 그이의 진가를 알릴 수 있는 기회가 왔구나 하는 생각에서 감개무량했던 것이다. 무소속 의원으로는 국제무대에서 아무리 실질적인 활동을 해도 전혀 빛이 나지 않았고 자기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엔 동시가입
그의 8일간 체험담은 조선일보에 5월 7일부터 3회에 걸쳐 발표되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원래 한국 대표단은 평양의 고려호텔에 유숙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막상 가보니 회의장에서 거리가 꽤 되는 모란봉 동녘기슭에 위치한 주암(酒岩)초대소로 결정을 해놓았더라고 한다.
숙소에는 각종 술이며 안주감이 떨어지지 않는 등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고 했다. 평양 봉수교회에서 4월 28일(일) 대표단 몇 분이 평양 봉수교회에 참석했던 일을 감명 깊게 이야기 해주었다. 이성봉 담임목사의 ‘형제를 사랑하라’는 제하의 설교도 들었다고 했다. 가지고 간 성경, 찬송가 책을 두고 왔고 피아노 제공을 약속하고 왔다고 들었다.
대표단이 금강산 관광을 요청했으나 하필이면 단장의 기조연설이 있는 날에 금강산 일정을 잡고 그것도 그날 통보를 해서 그이는 할 수 없이 금강산 관광을 못하게 되어 못내 아쉬워했다.
모든 의원들이 금강산으로 떠나고 회의장에는 단장과 사무처 직원 몇 명만 남았다고 한다. 남편은 IPU 본부의 양해를 받고 영문 연설문을 돌린 후 회의장에 드나드는 북측 사무직원들도 다 들을 수 있게 한국말로 연설을 했다. 북측에서는 당황하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의 연설에서 특히 주목할 대목은 유엔 동시가입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만일 북한이 동시가입을 끝까지 거부하면 남측은 단독 가입도 불사하겠다는 강경발언을 했다는 것이다. 통일원의 공무원들과는 달리 정치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남편의 연설은 IPU 총회 폐막을 하루 앞둔 5월 3일에 있었다. 그런데 불과 25일 후인 5월 28일 그동안 영구분단을 획책한다고 그렇게도 동시가입을 강력히 반대하던 북한이 느닷없이 태도를 바꿔 찬성한다고 발표했다. 언론은 마치 통일이나 된 듯이 온통 축제 분위기를 전했다. 북한은 그 후 우리보다도 먼저 유엔에 신청서를 제출해서 북한은 160번째, 한국은 161번째 유엔 회원국이 되었다.
남편은 기조연설에서 남측이 단독가입을 단행할 수 있다고 강조한 대목이 어느 정도 북한 정책변화에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곤 했다. IPU 회의 때마다 겪은 북한대표들의 태도에 비추어볼 때 북은 상대가 약하게 나가면 강하게 나오고 강하게 나가면 한풀 꺾기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평양 총회에서 그이가 행한 단장 기조연설의 마지막 부분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은 세계 12대 무역국으로서 유엔헌장에 규정된 모든 의무를 이행할 자격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또한 남북한은 유엔 산하의 15개 전문기구에 함께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오직 유엔에서만 한반도가 대표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지극히 비현실적인 일입니다. 그리고 남북한의 유엔가입이 분단을 고착화한다는 논리는 독일과 예멘의 통일에서 진실이 아님이 입증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남북한이 함께 유엔에 가입하여 세계평화와 협력에 동참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따라서 대한민국은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을 바라고 있으나 이것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먼저 가입하는 것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일본 후지 텔레비전 기자가 김일성 주석과의 건배 장면 사진을 나무판에 복사한 것과 그이와 김 주석의 대화를 찍은 비디오를 국회 사무실로 우송해 주어서 무척 고마웠다. 한국기자들만 카메라를 연회장에 갖고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김 주석과 건배가 있은 다음날 안내원이 주석과 건배한 유리잔을 기념으로 갖고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 안내원은 외빈들이 오면 잔을 갖고 가고 싶어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이는 좀 당황했으나 굳이 싫다고 해서 그 사람의 기분을 언짢게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떠나는 날 포장한 조그만 상자를 정중히 건네주어서 무엇인지도 모르고 가지고 와 열어보니 정종 잔 같은 조그맣고 평범한 유리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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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일성궁에서 한국 측 대표인 남편과 김일성 주석의 건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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