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소요의 클라이맥스가 외국어 대학에서 발생했다. 정원식 총리가 외대 대학원 강의를 종강하고 나오는데 수십 개의 계란과 밀가루를 퍼붓고 30분간 폭행을 가한 사건이었다. 그날 우리는 크게 충격을 받아서 잠도 이루지 못했다. 학생운동의 도덕성에 금이 가고 말았다. 온 국민이 경악했고 많은 사람들이 학생운동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80년대 중반부터 주사파가 대학가를 점령한 이후 전국의 대학에서 전대협 소속후보가 아니면 감히 회장으로 출마도 못하고 유명대학에서는 수억의 예산이 정권타도 운동에 쓰이고 있다는 지적도 받았다.
도대체 어떤 사상이나 이념이기에 남의 생명까지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동원되고 있을까 하는 강한 의구심이 일었다. 하여간 수많은열사들이 양산되던 시기였다.
학생시위대의 구호는 미군철수, 보안법 폐지, 유엔 단독가입 반대, 고르바초프 한국방문 반대, 팀스피리트 훈련 반대 등이 한동안 고정 메뉴였다. 이 구호는 북한 주장의 복사판이었다. 누군가가 쓴 ‘경제가 어려우면 가난해지는 것이지만 안보가 무너지면 보트 피플이 된다’며 우려하던 글을 읽고 나라 걱정에 한동안 불안했다.
야당의 이우정 의원이 어느 자리에서 소개되었을 때 학생들이 우 - 하며 “보수야당 물러가라”고 외쳤다는 기사를 읽고는 더욱 기가 막혔다. 이 의원은 경기 선배로 성품이 온화하고 인정이 많은 분이다. 국회의원이 되기 전에 재야운동에 헌신한 분이기에 학생들의 그와 같은 반응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일보의 유근일 씨는 60년대와 70년대 운동권은 지식인 본연의 자세에 가까웠고 보들레르의 시를 외우면서 불의와 싸우는 낭만이 있었으나 80년대의 운동권은 집단주의적 성향이 강해서 전체주의 정당의 당원들 모습이라고 분석했다.
내 58회 생일날에 동독 유학중 망명한 북한의 전철우 군과 장영철 군을 초대해서 식사대접을 했다. 88-89년 동독이 몰락할 때 그들은 북한도 그렇게 될 줄 알고 미리 남한으로 와서 자리 잡아 놓은 후 북의 가족을 맞이하려고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한에 와보니 한국학생들이 북한사정에 너무 어두운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그들은 가족들의 나들이 모습을 볼 때마다 부럽고 부모형제가 그리워진다고 털어 놓았다. 자식을 가진 나는 마음이 찡했다.
3당 합당
1990년 초 우리는 김천에서 신년 하례식을 시작으로 각종 행사에 참석하고 각 면을 순회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월 21일 갑자기 밤 9시까지 당무회의에 참석하라는 연락이 왔다. 모든 스케줄을 취소하고 남편을 따라 서울로 향했다. 눈이 와서 길이 얼어붙어 차들이 기어가야 했다.
김천에서 8시간 걸린 후 남편과 보좌관은 중간 안양 역에서 내려 전철을 타고 겨우 정시에 회의장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바로 그 당무회의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3당 합당을 결의하기 위한 회의였다.
다음날 청와대가 민정당, 민주당, 공화당 3당 합당과 당 명칭을 민자당으로 한다는 결정을 발표했고 이에 전국민이 경악했다. 이 소식을 듣고 앞으로 나타날 부작용으로 호남인들의 소외감, 이질적인 배경을 가진 3당간의 지분 싸움 등이 머리에 떠올라 걱정이 앞섰다. 결국 민정당 출신 박태준, 민주당 출신 김영삼, 공화당 출신 김종필, 세 최고위원이라는 3두마차가 민자당을 이끌게 되어 자연스럽게 계파가 형성되었다.
장로 장립
5월 19일 남편이 김천 황금동 교회의 장로로 장립되었다. 같은 교회 장로였던 시아버님과 권사였던 시어머님의 소원이 드디어 이루어진 날이었다. 그는 몇 달 전부터 지역구에 내려가면 낮에는 행사 참석에 바빴고 밤에는 성경공부를 했다. 장로교에서 장로는 교인들의 투표로 선임이 된 후 그 지역 교회 목사님 몇 분으로부터 구두시험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었다. 혹시 시험에 통과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내가 더 컸던 것 같다. 성경공부에 여념이 없는 남편의 모습은 대학교 강의 준비하던 모습보다도 더 귀하게 보였다.
황금동 교회는 기독교계에서 널리 존경받는 목사님들이 부임하신 곳이다. 그 교회에서 남편의 외삼촌인 강익형 장로님은 1932년, 시아버님은 1940년, 남편은 1990년 장로로 장립하게 된 것이다. 그뿐 아니다. 시어머님은 18년간이나 여전도회 회장을 지냈다.
가장 기뻐한 분은 시어머님이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교회에 잘 나가지 않는 며느리에 대한 불만이 컸는데 아들이 장로가 되어 소원 성취했다고 기뻐하셨다. 물리학자인 셋째 형도 현재 미국 한인교회의 장로이다.
외무 위원장 피선
외무위원장 취임, 13대 국회: 6월 19일 13대 국회 후반기 2년을 위한 상임위원장 선거가 있었다. 남편은 재석 283명 가운데 268표의 지지를 얻어 외무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운영위원회를 제외하고 모든 상임위원장 가운데 최다득표를 한 것이다. 여러 해 동안 지상발령만 받아온 남편이 드디어 자기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어서 기뻤다.
한겨레신문을 포함해서 모든 신문 방송에서 ‘될 사람이 되었다’고 우리보다도 더 기뻐해 주는 것 같아서 더욱 자랑스러웠다. 자격도 없고 함량미달인 인물이 어떤 자리를 무리하게 차지하는 것 같이 보기 흉한 것은 없기 때문에 남편에 대한 주변의 긍정적인 평가가 나를 기쁘게 했다.
이에 앞서 평민당이 상임위원장직 4석을 요구했으나 여당은 상공, 노동, 경과위원회 3석만을 양보했다. 미 의회에서는 다수당의 다선의원이 해당 상임위원장직을 맡는 것이 관습(seniority rule)이 되어서 자리다툼은 있을 수 없다. 주로 본인의 전문성과 관심분야에 따라 상임위원이 되면 계속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때문에 어느 정당이건 다음 선거에서 승리하면 누가 상임위원장이 되는지를 사전에 점칠 수 있다.
우리의 경우 전두환 대통령 시절 초선의원인 친인척을 위원장으로 선임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다, 각 정당 간 또는 같은 정당 내에서도 총선 후 회기 때마다 상임위원회 위원장 자리다툼이 치열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