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을묘(乙卯) 7월 15일, 도쿄 가는 대한항공 자국기에 몸을 실었다. 1963년 가을 미국유학에서 돌아온 후 해외여행은 무려 10여년 만이었다. 「파리」까지의 직행이 없던 시절이라 동경 하네다공항에서 초청국기(機)인 Air France로 갈아타야만 한다.
땅거미가 깔리는 초저녁, 도쿄를 이륙한 보잉707기는 소련령 시베리아 상공을 지난다. 북극점을 통과해 그린란드, 아이슬란드를 우측으로 하고 영국 북해를 지나 파리 드골공항으로 가는 루트였다. 시베리아 상공을 지나면서 새벽녘같이 밖이 환하게 밝아온다. 백야(白夜)인 것이다. 희다 못해 푸른색을 띠는 북극점 근처 얼음바다는 장관이었다. 하늘 색깔과 아래의 지구 색깔이 똑같아 황홀하고 무섭기까지 하였다. 아마 하늘나라 낙원에 가는 길이 이렇지 않을까!
좋은 좌석이어서 마음껏 밖의 장관을 뜬눈으로 감상하며 날아갔다. 바로 뒷좌석에는 일본인 60대 부부가 앉았는데 일본 동북지방의 어느 시골 소학교 교장 내외란다. 여름 방학을 이용해 꿈에 그리던 파리 여행을 가는 중이라고 했다. 얼마나 잘 살면 부부동반으로 초등학교 선생님이 저렇게 유럽 구경을 다닐 수 있을까 부럽기 한이 없었다.
그린란드, 아이슬란드 그리고 영국을 우측으로 끼고 서서히 고도를 낮추더니 드디어 파리 드골공항에 도착했다. 장장 10여 시간 만에 땅을 밟은 것이다. 입국수속 후에 루프트한자 항공기로 갈아타고 독일 중부의 대도시 프랑크푸르트로 날아갔다. 이번 방문의 주 무대는 프랑스였기 때문에 먼저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를 거쳐 파리로 다시 돌아가는 여정을 잡은 것이다.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하니 방송,TV 등 영어 채널이 많고 호텔이나 거리에서 언어소통에 지장이 없어 퍽 다행이었다. 미군의 장기주둔으로 미국 문화가 많이 흡수되어 있었고, 프랑크푸르트 근방에는 나토 미군병력의 주력 대부분이 주둔하고 있었다.
역 근처의 호텔에 여장을 풀고 저녁을 먹을 겸 시내구경을 나가기로 하였다. 호텔의 추천으로 전차(電車 : 유럽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두 칸이 연결된 시내전차)를 타고 5, 6개 정거장을 지나 교외 가까운 프라자 광장에 이르렀다. 식사와 댄스를 할 수 있는 클럽하우스를 찾아 들어가니 여기저기 영어를 하는 손님이 보이는데 대부분 미국 병사들이었다.
독일에서 유명한 소세지와 사와크라우트(양배추절임)를 곁들인 저녁식사를 끝내고 본격적으로 댄스를 즐기는 시간이 왔다. 물론 Lady Hostess가 있기는 하나 대부분 40~50대의 Single부인들이 와서 같이 춤을 즐기는 식의 Open club 형태로 운영되고 있어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춤을 청하면 스스럼없이 응해주는 그 부인(婦人)들! 2차 대전의 질곡을 온몸으로 체험한 독일인들. 그 심각했던 우월주의 「Elan」의 저돌성과 패기 그리고 하늘을 찌를듯한 그 자존심이 많이 마모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는 대학원 시절 「20세기 유럽사 : 20 Century European History」 특히 「나치즘」에 관해 많은 관심을 갖고 공부를 했기 때문에 전후 독일의 사회심리에 대하여 알고 싶었다. 소련군이 베를린의 마지막 방어선을 돌파, 결전을 벌이는 바로 3일 전까지도 수천 명의 클래식을 좋아하는 시민들이 지하극장에 모여 Wagner의 교향곡에 심취했다는 이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극에서 극으로 내왕하는 독일인들의 심리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하튼 전쟁에 관하여 가급적 언급을 피하는 이들이지만 「나치」에 대해서는 많은 죄의식과 유태인에게 미안한 감정을 숨기지 아니하였다. 자기들도 무와 감자로 연명하느라 모진 고생을 했고, 무엇보다도 시도 때도 없이 날아드는 연합군의 공습에 넌덜머리가 났다고 한다. 좋은 대화가 계속됐지만 내일의 일정 때문에 자정 무렵 클럽에서 철수했다.
다음날 Bonn 근처에 있는 「칼스루에」 원자력연구소를 방문했다. 예상한대로 패전국가로서 공격적인 이미지가 강한 핵개발에 관해서는 비교적 수동적인 입장이었다. 그저 첨단 분야인 만큼 하기는 하되 미국, 프랑스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뒤따라가는 정도라는 것을 느꼈다. 당일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서 본격적으로 근처의 문화 탐방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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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이델베르그의 강변공원에서 (1972.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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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시청광장에 있는 Goethe House에 들렀다. 조그마한 중정(中庭)이 있는 3층짜리 벽돌 건물인데 괴테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좀 빈약했다. 그러나 그 소박한 곳에서 그 유명한 「젊은 베르텔의 슬픔」, 「마왕」 같은 작품이 생산됐다니 불가사의였다. 특히 두 작품에는 많은 여행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마차로 달리고, 말을 타고 달리는 목가적이면서도, 또 때에 따라서는 무언가에 황급히 쫓기는 이야기 등이다.
그런데 다음날 하이델베르크로 기차여행을 하면서 나의 의문점들이 많이 풀렸다. 프랑크푸르트 주변에는 완만한 구릉과 평야가 적절히 이어지면서 라인강 지류에 위치한 절경의 도시 하이델베르크에 이르게 된다. 이 길을 마차로 달리면 하루거리라고 하는데 아주 멋진 Country road가 뻗어 있었다. 이 길을 오가면서 괴테의 그 실감나는 여행담이 가공되었으리라 생각했다.
다음날 일일관광으로 하이델베르크로 향했다. 프랑크푸르트는 독일의 중앙에 위치한 교통의 요충지이다. 100여 년 전에 지어졌다는 역사(驛舍)의 플랫폼은 8개 열차를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철골지붕이 장관이었다. 근대 독일철강공업의 위상을 잘 말해주고 있었다.
열차가 출발하기가 바쁘게 속도를 낸다. 약 20여분 도시를 관통하더니 평야가 전개된다. 2~30여 평 되는 개인주말용 텃밭이 계속 이어졌고, 각종 채소를 가꾸고 있었다. 구릉 쪽에 띄엄띄엄 집들이 보이지만 이렇다 할 마을은 보이지 않고 하이델베르크까지 두 시간 남짓 그저 널따란 대지를 기세 좋게 열차는 달려갔다.
「황태자의 첫사랑」, 학생시절 우리를 사로잡았던 그 낭만의 story를 떠올리며 역에 내렸다. 영화에서 보던 그 역사(驛舍)와는 좀 거리가 있었으나, 아담하고 깨끗했다. 대학 교정까지는 걸어서 2,30분 정도 되는 거리란다. 그러나 하이델베르크 시 자체가 대학도시로서 정문이 따로 없고 자연스럽게 교사(校舍)와 도시 상가가 잘 융합되어 있었다.
학생들이 산이 그리우면 남쪽 언덕의 중세시대의 성터로 올라가서 시내와 학교를 보면 될 것이요, 물이 그리우면 동쪽 라인 강으로 산책을 나가면 되고, 넓은 평야를 벗하고 싶으면 서쪽, 부모님 그리워 집 생각나면 역(驛)이 있는 북쪽으로 가면 해결되도록 되어 있는 맞춤대학도시라 할 수 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 자체는 그리 큰 Campus가 아니지만 자연을 아주 잘 이용했고 인간미가 있는 포근한 곳이다. 폭이 약 100여m 밖에 안 되는 라인 강 지류의 돌다리가 물건이었다. 베이지색을 띤 사암(砂岩)으로 된 아-치 식 교량인데 무게가 있으면서도 곡선의 부드러움이 우리에게 정감을 주는 돌다리였다. 강 양편으로는 산책과 운동이 가능하도록 공원화가 되어 학생들이 마음껏 Out-door life를 즐길 수 있게 해 놓았다.
남쪽 고성(古城)을 돌아내려와 강변을 걸어보는 재미도 너무 좋았다. 편하고 넉넉한 가죽신발 하나를 학교 매점에서 사 신고 오후 내내 걸어 다니며 구경에 취해 하루를 보냈다. 역시 낭만은 자연에서 오는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