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ST 근무의 여적(余滴)
사업관리실 책임자로서 특별히 창조적으로 개발하는 일이나, 시간에 쫓기는 일은 없었다. KIST의 모델인 미국 바텔연구소의 규정과 매뉴얼에 의해 잘 짜여진 KIST는 그저 조용히 굴러갈 뿐이었다. 다만 캄캄한 밤중에 불야성 같은 라이트 조명 아래 남녀 쌍쌍이 「라켓」을 휘두르는 모습에 배앓이 하는 인근 주민의 항의로 연구요원들을 설득, 갈수기 전력이 딸리는 시기에는 불을 끄도록 조치하는 정도의 일이 전부라고 하겠다.
그러나 정구나 농구를 하지 않는 부류가 문제였다. 최 장관은 연구하는 사람이 골프에 미치면 절대 연구 성과를 내지 못한다는 확신 아닌 확신 때문에 연구요원의 필드 방문을 금지했다. 다만 대외활동을 위해 감사, 행정관리실장, 사업관리실장 3인만은 골프가 용인되었다.
운동을 위해 주말에는 등산을 장려했고, 주중에는 KIST 도장에서 정각도(正覺道) 「하타요가」를 배우도록 했다. 전통적 인도요가에 우리 도가의 양생법을 가미한 정신수련, 단전호흡을 중심으로 수행해나가는 방법으로서 동적인 것과 정적인 것을 잘 조화 있게 조합한 것이다. 연구요원들에게 매우 잘 맞는 수련법이었다.
새벽 6시에 도장에 도착, 한 시간 동안 사범의 선도로 수련 공부를 하고 8시에 KIST 식당에서 식사를 끝내고 출근하는 스케줄이었다. 이것을 만 2년 동안 원자력연구소에 전출 간 후에도 계속 다녔고, 2년 수련 후에 혼자서 매일 아침 기상하자마자 운동을 하게 되고, 지금 40여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이 운동은 중단 없이 계속하고 있다. 이것이 나의 80 인생에 있어 별로 병원 신세도 지지 않고 고질병도 없이 건강을 유지하는 비법이 되고 있다.
KIST에 들어갈 때에는 만감이 교차했으나 떠날 때에는 인생에서 가장 귀중한 건강의 축복을 안고 나왔다는 사실이다. 두고두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고, 최 장관의 독선에 많은 섭섭함을 느끼고 있었으나 나의 건강 「요가」비법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용서되고 오히려 감사의 정까지 느끼게 된다.
원자력연구소로의 이전
KIST 행정에 한참 재미를 느끼기 시작할 무렵 어느 날, 나의 인천중학교 짝꿍이요 정구 파트너였던 윤용완(尹容完) 군의 형님 윤용구(尹容九) 박사(당시 KIST의 유치과학자로서 금속공학 관련 연구실들을 총괄하는 금속연구부장)가 찾아오셨다. 방문 요지는 원자력청(산하에 원자력연구소, 방사선의학연구소와 원자력병원 그리고 방사선농학연구소 3개 기관이 있었음)을 개편하여 특수법인연구소인 한국원자력연구소를 창립하는데 행정을 총괄하는 행정 관리실을 맡아 주었으면 좋겠다는 제의였다.
한 기관을 개편하여 창립한다는 것은 젊은 나에게 도전으로서 매력도 있었지만 가까운 친구의 형님을 상사로 모신다는 것이 속편한 일인 동시에 또한 부담이 되는 일이기도 하였다.
여하튼 직속상관과 신뢰로 호흡을 맞출 수 있다는 것은 가장 신나는 일이었다. 곧 수락을 했고, 다음날 한상준(韓相俊) 소장을 통해 간접적으로 최 장관으로부터 윤 박사를 도와주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연락도 와서 모든 것을 공식화했다. 그동안 KIST에서 잘 훈련된 몇몇 행정요원을 지원해 줄 수 있다는 약속도 받았다.
윤 박사는 즉시 소장으로 부임하고 개편을 서둘렀다. 나는 KIST에 계속 남아서 아직 후임이 결정되지 않은 관계로, 행정관리실장인 안병주(安秉柱) 씨에게 인계를 하고 주변 정리를 했다. 고마울 정도의 간곡한 글을 담은 공로패를 받고 그날로 원자력연구소로 행했다.
1973년 새로 개편 재탄생한 한국원자력연구소(KOREA ATOMIC ENERGY RESEARCH INSTITUTE)는 1958년 말 출범한 원자력원(原子力院)을 모태로 한다. 1953년 제 8차 UN 총회에서 「아이젠하워」미국 대통령이 “Atom for Peace”를 주창하면서 시작되었다. 한국은 미국의 권유에 따라 1955년 12월 「원자력의 비군사적 이용에 관한 한·미간의 쌍무협정」에 체결하고 문교부에 원자력원의 설립을 위한 법령제정과 예산확보를 위한 기능을 부여해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또한 미국은 「ATOM-for-PEACE PROGRAM」에 따라 한국에 원자로(原子爐) 도입을 원조하겠다고 나섰으며 그 결과 우리나라는 처음으로 「트리가마크 Ⅱ」 연구용 원자로를 도입하고 1962년 3월 19일 첫 임계에 도달함으로서 우리나라에 원자력 시대의 막이 올랐다.
60년대 이전에는 중앙공업연구소, 중앙지질광물연구소와 같은 연구기관이 있었으나 연구보다는 행정을 지원하기 위한 시험 위주의 기관들이었다. 따라서 원자력연구소는 원자력을 평화적으로 응용하기 위한 연구를 한다는 본래의 목적 외에도 우리나라 과학기술계의 구심적인 역할을 하는 한편, 과학기술인재를 유치해 조직화하고 또 젊은 인재를 양성, 배출하는 중요한 공헌을 해왔다.
초창기 원자력연구소에서 활동하던 많은 인재들이 해외에 나가 재교육을 받고 돌아오거나, 학계에 진출을 했다. 그리고 KIST, KAIST 창립 때 최형섭 박사를 필두로 한 이상수 박사 등 핵심 인재들이 대부분 원자력연구소 출신들로서 한국과학기술 인재의 산실 또는 양성소라고 불릴 정도로 그 공헌이 지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