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은 정초부터 바쁘게 돌아갔다. 비둘기 훈련, 군(軍)의 잦은 인사 등등 바짝 긴장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세시(歲時)는 거르는 법이 없다. 세검정 일대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파란 새 잎사귀가 마침 보기 좋게 돋아 오르는 때였다.
4월 22일 새벽 3~4시부터 아내가 약간의 복통을 호소한다. 만삭이지만 예정일은 좀 남아 있었다. 6시가 출근시간인데 매우 심해 보인다. 세검정 고개 쪽 부암동 입구에 평소 보아 둔 조산원에 들러 아주머니께 부탁을 하고 영등포 사령부로 달렸다. 부관은 언제나 사령관보다는 먼저 와 있어야 하고, 일직사령을 대동하고 기다려야 한다. 나는 외가 쪽을 닮았는지 아침잠이 많다. 대신 항상 늦은 잠을 자는 편이다. 따라서 새벽에 일어나는 것은 나에게는 항상 괴로운 일이었다. 이 버릇이 군대 생활을 통해 많이 변해갔다.
두 번째의 출산이지만 출산은 출산이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첫째 아이는 병원에서 태어나 별 걱정을 하지 않았지만 조산원에 맡겨서 잘 될는지 걱정이 되었다. 숙이 말에 의하면 진통을 한참 하다가 천장의 전깃불(그때는 백열등)이 눈에서 싹 가시는 혼절의 순간 아이가 나오더라는 것이다. 산모(産母)의 고통을 말해주고 있다.
그날은 곧장 퇴근하여 집앞 오솔길에 이르니 조카들이 쫓아 나오면서 “숙모가 아들 낳았어요!” 합창을 한다. 보에 싸인 애기는 쌔근쌔근 잠자고, 산고를 극복한 숙이는 약간 창백하면서 부어 있었다. 큰딸 효성이는 조카 방에서 놀고 있었다. 무사히 끝난 것이 다행이고 아들을 안아본 나는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이제야 비로소 확실한 가정인(家庭人)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그 주말에 여동생 영자(英子) 내외가 찾아왔다. 매제 김여석(金麗錫)이 갑자기 애기를 쳐다보면서 캑캑거리며 웃음을 터트린다. “왜 웃는가?” 물어보니, “애가, 애비를 너무 빼 닮아서, 신기해서.” 웃는다는 것이다. “뾰족한 코까지 닮았다.” 면서 박장대소한다.
육본(陸本) 참모부에 부임한 이후 나도 좀 안정이 됐다. 군(軍)도 최고회의(最高會議) 중심으로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육본은 텅 빈 느낌이었다. 장성들은 주로 최고회의가 자리 잡은 세종로(지금의 문화체육관광부 청사) 쪽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유학(留學) 문제를 본격적으로 추진할 시기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 통역장교(通譯將校)는 인적자원(人的資源) 부족으로 제대(除隊)가 보류된 상태였다. 다만 유학(留學)으로 인한 제대만 인정했다. 미국의 Stevens 박사는 John's Hopkins 대학에서 박사를 끝내고 펜실베니아 주(州)의 Lafayette College에서 조교수로 교편을 잡기 시작했다. 집도 마련해 내 방도 꾸며놨으니 언제라도 도미(渡美)하라는 연락이 왔다.
Lafayette 대학은 장로교 계열의 후원으로 운영되는 학교로 역사가 약 200년이고 한국과도 인연이 많은 교육기관이다.
우선 서재필(徐載弼)선생이 처음에 미국에 들어간 것도 이 대학과 관련된 종교단체에서 후원했고, Lafayette에서 한 학기를 보낸 적이 있다. 교단(敎團)에서는 목사 수업을 받고 한국으로 돌아갈 것을 원했으나 선생은 이를 거절했다. 2학기 때부터 단신으로 「필라델피아」로 내려가 고학하고 끝내 좋은 후원자를 만나 의과대학(醫科大學)에 입학했다.
그 후 서재필 박사가 당신이 자식처럼 아끼던 임창생(林昌生 : 前 Temple대학 정치학 교수, 前 주(駐) UN 한국대사(민주당 시절))박사를 Lafayette에 보내 졸업시키고 평생 비서로 썼다. 임(林)교수는 스승의 은덕을 기려 Lafayette에 장학기금을 서(徐)박사 명의로 기부해 놨다. 일제 때 유학을 간 윤치영(尹致英)선생도 잠깐 그 대학에서 기거를 하며 신세를 진 적이 있다.
나에게 입학원서도 도착했고, 장학금은 학비 면제인데 「스크랜튼」 시(市)에 거주하는 성명을 밝히지 않은 어느 독지가가 부담한다고 했다. 그리고 먹고 자고 하는 Room and Board(숙식)는 Stevens 박사 댁에서 해 주기로 했다. 재정보증인(affidavit)도 Stevens 박사가 서 주셨다. 이제는 수속하는 일만 남았다.
어느 주말 오후, 한가한 시간을 이용해서 서(徐) 장군께 유학관계를 말씀드리고 제대신청을 하겠노라고 여쭈었다. “아쉽기는 하지만 자네의 장래 문제이니 어떡하겠나.” “여비 등은 마련했나?” 등등 걱정을 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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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관구를 떠나면서 사령관, 부사령관에 소속되어 있던 장병과의 송별 사진. (차고 있는 소형 브로닝 권총은 서 장군 보호용 이었다. 살벌한 군사정변기에 멋으로 휴대한 것이 아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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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부터 주변의 가까운 분들에게 제대하겠다는 뜻을 전하고, 12월을 목표로 수속에 들어갔다. 미국(美國) USIS에서 치르는 영어능력시험 결과를 미국 대학에 보내고, 문교부(文敎部)에서 실시하는 유학시험에도 통과했다.
제대 수속을 하는데 다행히 부관감실(副官監室) 장교과장(將校課長)이 고향 선배인 엄기표(嚴基杓 : 후에 부관감(副官監), 소장(少將) 예편) 대령이어서 1주일 만에 제대증을 받고 본격적으로 여권수속에 들어갔다.
당시 여권, 그것도 단수여권(單數旅券)인데 구비서류와 수속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보통 6개월이라는 세월이 걸리고 구비하는 서류만 하더라도 ‘장골(壯骨) 한 지게’가 된다고 했다. 군복을 착용한 채 관공서에 출입하는데 5.16 직후인지라 군인에게는 우선권이 있었고 잘 해주었다. 모든 게 약식(略式)이고 급행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구비서류는 신원조회(身元照會)는 필수이고 호적(戶籍), 주민거주증(住民居住證), 신원증명, 인감(印鑑), 납세완납증명(納稅完納證明), 입학허가서, 재정보증 등등 증명이라는 증명은 모조리 첨부해야 하는 시기였다.
지금 따지고 보면 대형 노랑봉투 다섯 개 분량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한 곳, 서울 외무부(外務部)의 여권과(旅券課) 한 곳에서만 발행했다. 지금에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따라서 여권(旅券) 하나 얻어 쥐면 과거합격(科擧合格) 출세한 기분이었던 시절이다.
여권 관문을 통과하면, 미 대사관의 VISA 수속이 있는데 이것도 까다롭기 짝이 없다. 위생, 건강상태를 가장 따졌는데, 결핵(結核)을 앓고 있으면 장군(將軍)도 VISA가 거절됐다. X-Ray 사진을 별도로 Hand Carry 해서 미국 입국 첫 공항에서 제시해야 했다.
X-Ray를 찍는데도 지정 병원이 있어 마음대로 어느 병원에서든 찍어서는 안됐다. 전국에 딱 두 곳 청량리 위생병원 그것도 Dr. 민의 서명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세브란스」 병원의 누구누구 하는 식(式)이다. 후진국의 비애란 이런 것인가 서글프기도 했다.
X-Ray 사진만 찍으면 그만인데 혈압계를 들이대면서 맥박이 좀 이상하다고 하고는 「심전기(그때 당시에 최첨단 의료장비라 했음)」를 또 들이댄다. 약 2m정도 되는 기다란 테이프 「그래프」를 찢어들고 판독을 하는데 검사비가 어마어마하다. 제대비(除隊費) 몇 푼 받은 것이 다 소진됐다.
여러분! 지금과 같은 이런 요순시대(堯舜時代)가 일찍이 없었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당시 「Full 스칼라쉽」 이라고 하면 AID Loan에 한한 공직자, 대학교수를 위한 단기 유학 1년 코스와 Fulbright 장학금 정도였다. 종교재단 주선이 대부분이고 개인의 장학금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고학(苦學)길을 떠나더라도 든든한 「스폰서」가 있어야 했고, 보증이 시원찮으면 중도귀국 하는 학생도 있었다.
과학기술(科學技術) 계열 학생은 교수를 잘 만났을 경우 그리고 본인이 성실하면 미국에서의 공부는 보장되었다. 학교가 주선해 주거나 개별 독지가들이 생기기 마련이어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사람들이 곳곳에 있어 우리의 애로를 듣고 무슨 방법이든지 해결해 주는 측은한 친한적(親韓的)인 분위기가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