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관리실의 개편과 인사_2 (103회)
  제13장 원자력 연구소

경제기획원 예산국, 청와대 경제수석실 등에 다니며 브리핑을 통해 사업 설명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과기처에서는 위 사업내용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었고, 예산당국을 직접 공격하도록 협조해 주었다.

예산당국에 가서는 내가 직접 설명했는데 효과를 얻기 위해서 사전에 연구소의 박사 선생님을 모시고 많은 과외공부를 했다. 주된 선생님은 원자력 정보 자료실의 이원구 차장이었다. 오랜 원자력 정보를 취급해 온 덕분에 그 분야에서는 탁월한 지식을 갖추었고, 조곤조곤하게 설명하는데 많은 지식이 나에게 전달되었다.

핵분열의 원리에서부터 핵주기 그리고 원자력발전, 「프로토늄 핸들링」에 이르기까지 인문·사회 전공인 나에게 새로운 분야에 눈을 뜨게 해 주었다. 원자력연구로(爐) TRIGA MARK Ⅲ에서 현장 설명을 하고 거대한 Glove Box의 기능 등을 접하게 해 주었다. 단시간 내에 예산당국의 관료들에게 알아들을 수 있는 설명으로 치고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역시 행정가가 소화해서 행정가에게 설명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고 신속하다는 것을 느꼈다.

과학기술 계통의 인사에게 Presentation을 시켜보면 과학적인 Detail에 치중해 설명하다 보면 행정가들은 금방 흥미를 상실하고 만다. 행정가들은 과정보다는 결과물을 더 중요시하며 핵심에서 모든 것이 끝나야 한다. 즉 Yes or No의 빠른 판단이 중요하다. 청와대에 설명대상은 오원철(吳元哲) 경제 제2수석, 그리고 김병원, 이남표 비서관이었고, 오(吳) 수석이 사실상의 핵심 판단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경제기획원 예산국은 과장급에서 총괄하는 강봉균(康奉均) 과장 그리고 과학기술분야 예산의 책임을 지고 있던 최수병 과장, 예산국장으로 최동규(崔東圭) 씨가 있었다. 원자력 개발이라는 대전제에서는 모두 협조적이었다. 그러나 국고 수입은 한정되어 있고 지출 요구는 엄청나서, 예산당국인 기획원에서는 분야 별로 적정한 배분에 골몰하다 보니, 우리 욕심대로 되지 아니하였다.
 
③ 예산확보 : 돌이켜 보면 40년 전의 예산투쟁이나 2010년 지금의 예산따기 전쟁 사이에는 전혀 변화가 없는 모양이다. 비교적 최근(2010년 9월 11일자 조선일보 토요섹션) 김윤덕 기자의 넋두리 기사가 대단 흥미로워 여기에 인용한다.

「...바야흐로 예산전쟁의 계절, 해마다 이맘때면 기획재정부 예산실 안팎에선 진풍경이 펼쳐진다. 한 푼이라도 더 예산을 타내려 읍소하는 각 부처 공무원들과 한 푼이라도 아껴 최대 효율을 내려고 머리를 쥐어짜는 예산실 공무원들의 뜨거운 줄다리기! 각 부처가 제출한 내년도 예산편성 안(案)에 기획재정부 예산실이 ‘칼자루’를 휘두르는 시간이니 그야말로 피가 튀긴다. ‘을’ 입장에 서있는 부처 공무원들의 노력은 눈물겹다. ‘갑’ 중의 ‘갑’일 수 밖에 없는 예산실 담당 실무자들을 공략하기 위해 각종 전략을 구사한다...」

예나 지금이나 예산 따기는 전쟁이고 전투이다.

특수법인 연구소로 출범한 이상 첫해의 예산 규모가 다음해의 출발기준이 되기 때문에 첫해부터 바짝 긴장해 총력전을 펴야 한다.

 
▲ 원자력연구소 현판식 (1973.) [출처 ; 한국원자력연구원]

매년 8월에서 9월초 기획원에서 국회로 예산안이 넘어갈 때까지 예산당국은 문전성시를 이루고, 예산국장 면회는 하늘의 별따기다. 과장급까지의 실무진과의 협의는 대충 마무리 되었으나 협의 과정에서 잘려나간 항목, 반영되지 못한 신규 사업 등은 예산국장과 담판을 해야 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시간을 얻기는 불가능했다. 할 수 없이 비상한 작전을 펴야 하는데 점심시간에 무조건 국장실로 치고 들어가는 방법밖에 없다. 염치불구하고 이다. 예산 작업이 한참인 7~8월에는 예산국은 국장 이하 전원이 도시락 지참이다. 다행히 총리실 근무당시 최 국장과는 3,4년간 내가 경제각의에 참석하느라 일주일에 두 번씩 출입하다보니 두툼한 안면을 유지해 왔고, 다소 결례가 되더라도 무관하게 되어 있었다.

입구의 여비서에게 “국장님계서~ ” 하며 밀고 들어 가는데야 저지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마침 도시락으로 점심 중이었다.

보온밥통에 쌀밥 그리고 반찬통에 국물이 그득한 열무김치가 전부였다. 무척 검소한 식단에 놀랐다. “김 실장, 웬일이오?”, 대답은 “이 시간밖에 내 차지가 안 되니 염치불구 합니다.” 이다. 대뜸 A4 용지 두 장에 간결하게 정리해 간 자료를 내밀며 “이것은 각하 지시사항, 저것도 각하 지시사항” 등 청와대를 팔면서 애소를 해 본다. 그런데 “김 형, 각하 지시사항이라고 다 되는 것은 아니요. 일국의 최고 지도자는 길가에 잡초 한 포기에도 관심이 있는 법이요. 각 부처의 각하 지시사항만 반영하더라도 세입(稅入)을 초과하는 판에, 우선순위로 결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요.” 한다.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겸연쩍어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그런데 “종합 조정 때 검토해 보겠으니 자료를 놓고 가시오, 내 밥 좀 먹게.” 밖으로 나오니 대기하고 있던 서호 서연호 차장이 뒤따라오면서 묻는다. “어떻게 됐어요?” 좀 일찍 나오는 것이 불안했던 모양이다. “자료를 두고 가라고 해서 두고 왔어.” 했더니 “그러면 됐습니다. 성공입니다.” 한다.

예산작업에 잔뼈가 굵은 서(徐) 차장의 분석평가에 위로를 얻고 돌아왔다.

그 무덥던 8월 한 달을 예산투쟁으로 노심초사했다. 정부안(案)이 국회로 넘어가는 9월 초, 연구소를 위한 총사업비는 원자력청 시절에 확보했던 액수의 배(倍)에 가까운 20억으로 확정되었다. 그리고 특히 그동안 집요하게 추진했던 특수사업(핵연료 주기(週期)사업)을 일단 사업으로서 정식으로 인정받은 것이 큰 소득이었다. 이제 매년 건설비 등이 자동적으로 반영되며, 해외과학자 유치도 본 괘도에 오르게 되었다.

그 후 약 1년여가 지나자 보은의 때가 왔다. 최동규 국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좀 만났으면 좋겠다는 요지였다. 부탁인즉 자기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고교, 대학시절 누님 집에서 신세를 지며 공부를 했다 한다. 매부는 일제 때부터 철도국 기술자로 재직한 분으로 미국이민 신청을 해놓고 있어 6개월 이내에 떠날 예정이라고 하면서, 누님의 외아들인 조카를 좀 훈련시켜 달라는 부탁이었다.

연구소에서 한참 인원을 늘리는 마당에 6개월 정도 임시직으로 데려다 쓰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정식직원이 아니기 때문에 인사위원회에 회부할 필요도 없고, 실장인 나의 전결로 가능했으므로 쾌히 승낙하고 다음날 외국인 안내 등을 관장하는 홍보부에 배치했다. 초기의 원자력사업에 이해를 갖고 적극 밀어준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을 기회가 이때 있었다.

원자력연구소의 예산 확보는 날이 갈수록 날개를 달아 어느 연구소보다 앞서나갔다. 여담이지만 새로 설립된 한국기계연구소 초대(初代) 소장 김훈철 박사 같은 분은 나에게 대놓고 “이제 그만 훑어 가!” 라며 농 반, 진 반으로 항의까지 했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해서 인간에게 불의 지혜를 전한 「프로메테우스의 꿈」은 우리나라에서 실현하게 되었다.

 
  행정관리실의 개편과 인사_1 (102회)
  특수사업(핵연료주기(核燃料週期) 확립)(104회)
|1||2||3||4||5||6||7||8||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