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관리실의 개편과 인사_1 (102회)
  제13장 원자력 연구소

① 원자력 시절의 사무국을 확대 개편한 것이 한국원자력연구소의 행정 관리실이었다. 우선 기획과 예산을 총괄하는 기획차장(기획, 예산, 회계과), 일반 행정(총무, 인사, 시설과)을 담당하는 행정차장 그리고 연구 관리를 담당하는 차장 등으로 편성되었다.

초대 행정차장은 이주호 씨, 많은 규정과 개편작업에 기여했던 분인데 중간에 건강이 좋지 않아 사임하고 강 ? 과장이 차장으로 승진하였다. 연구관리 차장은 직제 상 연구부소장의 산하였으나 업무상 행정관리실장과의 협의관계로 행정실장의 통제를 받았다. 차장으로 한국지질연구소에서 스카웃 해온 서울공대 광산과 출신인, 연구사업과 「프로젝트」에 경험이 많은 서효준(徐孝俊) 씨가 맡아 주었으며, 초창기 원자력연구소 연구 관리의 기초를 닦으며 많은 공헌을 했다.

나와 가장 밀접하게 일한 차장은 역시 기획·예산을 책임지는 기획차장이었다. 원자력연구소 초창기 모든 회계체제가 기업회계(특별회계)로 바뀌어야 하고, 연구소에 부과된 새로운 특수사업을 위해 최대한 예산을 정부로부터 따야 하는데 거기에는 예산회계에 경험이 많은 분이 절대 필요했다. 연구소 내에서는 그러한 인재를 획득할 수 없었다. KIST에서 할애 받은 과장급 양광남(梁光男) 씨 같은 유능한 중견급이 있었으나 과기처 그리고 기획원 예산국과 상대할 노련한 고병(古兵)이 필요했다.

내부의 저항을 의식하면서도 외부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때 운명의 작흥(作興)이랄까, 내가 평소 눈여겨 봐왔던 나의 경남고 일 년 후배인 서호 서연호(西湖 徐演浩)와 재회했다. 나와는 총리실에서 서울시 담당을 했을 때 자주 같이 작업을 했기 때문에 예산·회계의 달인으로 알고 있었다. 당시 서울시에서 엘리트 재정 관료로서 우의정 윤백영(尹伯榮 : 후에 서울시부시장 역임), 좌의정 서연호로 지칭하고 있을 정도였다.

세월이 지나 서호(西湖)는 몇 개 주요 과장을 지내고, 시 재정의 핵심적 자리인 세정과장을 하고 있는데 호사다마라 부하 직원 한사람이 부정을 저질러 감독책임을 지게 되었다. 급기야 가장 한직인 서울시 공무원 교육원 교수부장으로 좌천을 당하고 말았다. 자존심이 강한 서호(西湖)는 공직을 그만 둘까 등 많은 고민과 번뇌에 빠졌다.

그는 6, 7년 전 계장시절에도 부하직원의 부정으로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는데 시에서 하나의 Legendary한 이야기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야기인즉 부하의 공금횡령사실이 드러났는데, 과장에게 미안해 보고할 수가 없었던지 2, 3일 휴가를 얻어 고향인 김해 대저면 집에 내려갔다. “아버지, 저 징역가게 됐심더, 돈 좀 해 주이소.” 하여 돈뭉치를 얻어 야간열차로 상경한 서호(西湖)는 횡령금액을 깨끗이 정리하고, 그때 비로소 과장과 국장에게 보고했던 일화가 있다. 책임감과 의리의 사나이로 통하는 인물이었다.

나로서는 서호가 꼭 필요했다. 윤 소장과 상의했더니 “By all means!” 하면서 허락해 주었다. 중국 삼국시대에 유비의 심정으로 삼고초려 끝에 반쯤 뜻을 우리 쪽으로 돌려놨다. 앞이 창창할 수도 있는 시(市) 공무원직을 포기하게 되니 여러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형님, 약 1주일 시간 말미를 주세요.” 하고는 내외가 동해안 강릉에 들른 모양이다. 새벽 장엄한 일출을 쳐다보면서 “동해 용왕님! 서연호, 시청 공직 내려놓고 팔자 바꾸겠습니다!” 하고 고함을 세 번 지르고 나니 마음이 정리가 되더란다.
 
▲ 초창기 원자력 연구개발의 주역들 / 가운데가 소장 윤용구 박사이다

② 이렇게 우리에게 합류한 서호는 나와 함께 본격적으로 연구 사업비, 과학기술자 처우 개선비 그리고 해외 과학기술자 유치비 등을 골자로 한 예산작업을 개시했다. 요구액은 전년도 대비 약 3배에 가까운 액수였다.

이 작업에 기여한 또 한 분, 잊을 수 없는 인재가 있었다. 나와 함께 과기처에서 연구조정관으로 일했던 이덕선(李德善) 씨다. 어느 날 이(李) 조정관이 연구소로 나를 찾아왔다. 말인즉 과기처에서의 본인 역할은 이제 한계에 왔고 신생 연구소에서 마음껏 일해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말 끝머리에 ‘자신의 신분상의 보안 문제도 김형(金兄)에게 맡기고 싶다.’ 고 했다. ‘이제는 중앙부처 보안감사 때마다 더 이상 당하는 것, 자존심도 상하고 이제 이 모든 것, 졸업을 했으면 좋겠다. 문제가 생기면 김형(金兄)은 조용히 그때그때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안다.’ 라고까지 했다.

이(李) 조정관의 사연인즉 6.25 사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일성대학 철도기계과를 졸업하고 6.25 때 인민군 육군 중위로 남하했다가 후퇴할 때 해방 전부터 서울에 시집와 사는 누님 댁에 숨어 있었다. 수복 후에 남한 육군보병학교에 입교, 병기장교로 임관했고 대위 시절 이북에서 이덕선을 잘 알던 사람이 좀 의아하게 생각하고 투서를 했다. 방첩대가 곧 조사를 시작했고, 임관 때 인민군 출신이라는 것을 숨겼다는 이유로 문제가 된 것이다.

주변의 많은 인맥을 동원하여 무사하게 되었으나 의원제대(依願除隊)를 신청해 군(軍)을 떠나게 되었다. 특히 병기장교로 근무하면서 「병기재고관리교본」 등을 작성하는 등 많은 공헌을 했고 전혀 혐의점이 없어 자진 퇴역으로 마무리 된 것이다. 그 후 경제과학심의에 별정직으로 발탁되어 근무하다가 과기처가 발족되면서 정부 내 고위직의 연대 보증으로 간신히 정규직 기감(技監:2급)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기관 보안감사 때마다 총무과장 등 주변의 증언이 필요했다. 본인도 가끔 신문을 받는 처지에 언제나 불안했고 자존심도 몹시 상했던 모양이다. 어디를 가나 신원 상의 특기(特記)는 따라다니기 마련이지만 산하기관에 와 있으면 일다운 일도 할 수 있고, 진급에도 신경 쓸 필요 없고(과학기술자로 책임급 실장이면 그것으로 최고의 자리를 누릴 수 있으며 따라서 보직에 연연할 필요가 없음) 또한 신분특기(身分特記)에 대한 「이지메」도 없음을 간파한 이(李) 조정관은 연구소에 와 있기를 간곡히 희망했다.

나로서는 백만대군을 얻은 셈이다. 연구사업 기획실을 새로 만드는 직제 개편안을 이사회 서면결의로 통과시키고, 인사위원회를 열어 전격적으로 임명을 마무리 지어 입소하게 되었다.

이(李) 실장, 서호(西湖) 그리고 나, 삼인방은 특수사업의 예산 따기 작업에 착수했다. 이(李) 실장은 아주 명석하고, 탁월한 기획능력의 소지자로서 당시에 유행했던 「브리핑 차트」를 화려하게 만들어 냈다. 그리고 주빈(主賓)이 보는 책자도 색깔을 넣어 총천연색으로 필경해서 만들어 냈으니 당시 그림만 보더라도 혹(惑)할 정도였다.

「차트와 책자」 생산을 윤석만 군이 수자원개발공사에서 임시직으로 데리고 있던 일급 필경사 강요한 씨를 정식 직원으로 연구소에 유치를 해 와 신나게 일을 치러내게 했다. 모두들 손발이 정말로 잘 맞아 돌아갔다.

 
  조직개편과 연구소의 상부조직 (101회)
  행정관리실의 개편과 인사_2 (10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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