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개편과 연구소의 상부조직 (101회)
  제13장 원자력 연구소

조직 개편과 규정 제정

나는 1973년 3월 새로 개편된 원자력연구소에 부임했다.

우선 시급한 것은 각종 규정을 만들고 조직에 따른 인사를 단행하는 것이었다. 한국원자력연구소의 설립법과 관계법령은 이미 되어 있었고, 정관까지도 마련되어 있었다. 관계법과 정관을 뒷받침하는 각종 규정의 조속한 제정이 필요했고 초안은 모두 행정실의 소관업무였다.

기본 규정으로서 연구소 정관에 따른 운영기금 관리 규정, 조직 규정으로 연구소 직제에 따른 업무분장 규정 그리고 각종 위원회의 규정으로서 연구업무심의회 규정, 인사위원회 규정 등과, 연구소의 운영관리에 필요한 인사규정, 급여규정 등 많은 규정을 새로 제정해야만 했다. 약 6개월 동안 야근을 매일 이어가다시피 하며 작업을 했다. KIST라고 하는 좋은 선생님이 있었고 일본의 원자력연구소의 각종 규정을 참고하면서 작업은 효과적으로 진행되었다.

이 자리에서 한 가지 밝힐 것은 원자력 관계법을 위시해서 각종 과학기술에 관계되는 법령과 규정, 그리고 환경에 관련되는 법령은 이웃 일본 것을 참고함으로써 우리 정부 기관에서는 빠르고 생산적인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어순(語順)과 문법(文法)이 거의 같은 관계로 토씨와 이음씨만 조정하면 한문(漢文) 글을 그대로 활용할 수 있었고, 어휘도 별도로 만드는데 골몰하지 아니하여도 많은 부분, 답이 이미 나 있었다.

일본은 1개 법령을 다듬는데 미국, 프랑스 등 선진국의 것을 해석하고 정리하면서 4~5년이 걸렸다고 한다. 우리가 작업을 하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일본 연구기관에 연수 가 있는 우리 직원에게 연락하면 법령규정 등을 즉시 보내오곤 했다. 예민한 기술관계가 아닌 한 행정, 관리에 관한 것에 대해 일본은 매우 협조적이었다.

한편 대만(臺灣) 핵능연구소와 행정상의 협조는 잘 되었으나 규정이나 「매뉴얼」은 중국어 또는 직접 영어로 된 것을 쓰고 있어 별로 도움이 되지 아니하였다. 중국 본토(당시 중공(中共)이라 불렀음)의 것은 교류할 엄두도 못내는 시절이었다. 당시 일본 연구기관의 고위직과 대화를 해 보면 일제 강점기에 한국에 행한 못된 짓에 대하여 많은 반성을 하면서 위로하는 일본 지식인들을 많이 만났다. 사죄의 뜻인지는 모르나 많은 도움을 받았다.

여하튼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1973년 말, 도서관리 규정까지 포함한 30여개의 주요규정, 규칙, 법령 등이 집대성된 한국원자력연구소 종합규정집을 완성 출간하게 되었다.
 
연구소의 상부조직

- 원자력병원 등 -
법인연구소로 개편된 당시의 조직은 소장 아래 이공(理工) 담당인 제 1연구담당 부소장과 생명과학 담당인 제 2연구담당 등 2개 부소장과 행정관리실장이 있었으며, 원자력연수원과 암(癌)병원이 각 제 1 및 제 2부소장 산하에서 운영되고 있었다.

1974년 8월에는 제 2연구담당 부소장 산하의 병원장이 분리되어 부소장급으로 승격되었으며, 그해 12월에 특수사업 담당 부소장, 공학담당 부소장, 연구담당 부소장의 3개 부소장과 원자력병원장으로 승격되면서 병원장 인선(人選) 문제가 대두되었다. 의료기관의 생리상 출신학교와 선후배 서열을 철저하게 챙겨야만 했다. 가령 서울의대 출신이 원장이라고 하면 과장은 물론 인턴, 레지던트까지 서울대 출신 일색이요, 또한 연세대 의대 출신일 경우 예외 없이 연세 출신이 줄을 서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 원전 행정관리실장 시절 집무실에서

원자력병원의 뿌리는 서울대병원이었기 때문에 서울대병원 내과가 주동이 되어 있었다. 원자력연구소 개편 전의 방사선의학연구소 소장은 이장규(李章圭) 박사였다. 그 역시 경성제대 의예과 출신에 서울의대 졸업이었다.

조직이 개편되면서 이 박사는 개업을 택하여 사임하였고 후임이 필요했다. 이제 특수법인의 병원이었기 때문에 체제의 재정비는 물론이고 실적에 따른 보수체계가 마련되었기 때문에 관(官) 체제하에서의 평안한 의사선생님으로는 병원이 운영될 수가 없었다.

백방으로 원장을 물색하는데 하루는 윤 소장이 서울의대의 고창순(高昌舜)이 어떻겠느냐고 운을 떼었다. 고 박사는 나와 경남고 동기일 뿐만 아니라 나의 내자가 고 박사 누님에 이끌려 꽃꽂이계에 입문하게 된 인연도 있었다. 고 박사는 선대로부터 의사집안이고 방사선의학연구소의 창설 멤버로서 이미 원자력연구소와는 연(緣)을 맺고 있었다.

의료기관의 장(長)은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실력을 인정받는 Authority가 되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Leadership과 인화(人和)가 또한 뛰어나야 한다. 고품위의 지식계급사회에서의 필수적인 요건이다. 이런 면에서 고 박사는 자타가 인정하는 적임자였다.

다음날 당장 고 박사를 만나 간곡하게 부탁을 했고, 사탕발림도 했다. 원장 전용차를 새 차로 바꿔 줄 것이고 보수, 판공비 등 두둑한 돈주머니도 내보였다. 나로서는 최대한의 지원을 약속했던 것이다. 일단 의과대학 쪽하고 상의해서 결론을 내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런데 이틀이 지나 3일이 가도 아무런 회답이 없다. 다시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서울대병원을 떠나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원자력병원 원장 임기가 끝나면 대학으로 원대복귀하는 것을 고 박사는 희망했고, 당시 의대병원 내과의 맹주였던 이문호(李文鎬) 선생에게 상의했더니 복귀를 약속하기는 어렵다는 한 마디에 마음을 바꾼 것이다. 그만큼 서울의대의 교수 자리가 매력적이었고 나로서는 실망이 대단했다. 원점으로 돌아가 새 인물을 물색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방법은 이장규(李章圭) 선생인데, 직접 가서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이 박사는 나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 분이었다. 이 박사 아버님과 나의 아버님은 체신부에 같이 근무를 하셨고 서울 필동 관사에서 윗집 아랫집으로 같이 살았다. 가끔 관사 전용 정구장에서 공치기 연습도 같이 했다. 이 박사 여동생은 당시 신식여성으로서 정구에 아주 능했고, 우리 아버님의 정구 상대로서 두 집안이 가까웠던 것이다.

연구소장 윤 박사와 상의하고 다음날 그 당시 아주 귀했던 양란(洋蘭) 「카틀레야」 한 쌍을 사들고 이장규 박사의 내과병원으로 찾아갔다. 예능감각이 뛰어나고 초화(草花)를 특별히 좋아하는 것을 아는 나는 그 점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개업한지도 얼마 안 되었고 아들, 딸들이 뉴욕에서 「줄리아드」음대에 유학을 하고 있어 학비 송금도 만만치 않은 어려움이 있었다.

여하튼 삼고초려하는 심정으로 3,4일을 매일 들러 간곡히 부탁한 끝에 허락을 받아냈다. 당신이 초석을 놓았던 병원이었으니 반듯한 의료기관(암 전문병원)으로 육성할 용심과 의무감이 있었으리라 믿는다. 이렇게 해서 병원 인사(人事)를 끝을 냈다. 원자력병원은 그 후 의료수요의 폭발과 함께 훌륭하게 발전하여 공릉동에 새 청사를 짓고 암 치료에 많은 공헌을 해 오고 있다.

 
  KIST 여적(余滴)과 원자력연구소로의 이적 (100회)
  행정관리실의 개편과 인사_1 (10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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