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소속되어 있던 4소대는 대대 본부가 위치한 광주 경안과 남한산성 입구 구간의 작업을 했다. 그때 경기도 광주 지역은 공기도 맑고, 경안천에서는 은어 떼가 몰려다닐 정도로 깨끗한 곳이었다. 경안에는 비단공장들이 여러 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비단을 생산하는 지역으로도 유명했다.
비단 공장에는 수백 명의 여공이 있었고, 그 가족들도 상주했기 때문에 주말에는 경기도 광주와 천호동을 오가는 마이크로버스를 수시로 운행했다. 외출 후 서울에서 부대로 복귀하는 일요일 저녁 늦은 시간에는 12인승 버스가 24인승으로 돌변하여 말 그대로 숨쉬기도 어려울 만큼 만원 버스가 되었다. 통행금지 시간인 자정이 다가오면 버스 승객수가 더욱 늘어났고, 우리 부대 군인들과 비단공장 여공들이 같은 버스를 타고 갔기 때문에 때때로 즐거운 비명이 들리기도 했다.
그때도 조 중위와 나는 광주 경안의 하숙집에서 같은 방을 쓰고 있었다. 그 하숙집은 광주지역에서 비교적 넉넉한 집이었는데, 쌀가게를 운영했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가게를 들락거렸다. 우리 식사는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지 않은 임시 며느리가 준비했다. 그녀는 인상이 후덕해 보이고 마음씨도 착했다. 우리 밥상에는 항상 음식이 넉넉하게 올라왔지만 모자라면 언제든 더 갖다 주었다. 조 중위와 나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대식가들이었다.
조 중위는 부대 작전장교라서 비교적 시간이 자유로웠지만, 일선 작업 소대장으로 야전 생활을 하던 나는 항상 바쁜 일정에 맞춰 움직여야 했다. 그러나 식사만큼은 가능한 한 같이하였고, 그 며느리의 고생이 여간 아니었다.
그러던 초가을 어느 날, 하숙집 여주인이 우리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먼저 말 꺼내기 어려운 표정을 짓더니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조 중위! 임 소위! 시간 나는 대로 하숙방을 옮겨주었으면 해요.”
“아니, 왜요? 우리가 특별히 잘못한 거라도 있어요?”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제안에 놀라 우리가 되묻자 여주인이 껄껄 웃으며,
“그게 아니고…, 사실은 우리 집 고추장 독이 다 비었어요. 두 분이 하도 잘 드셔서(주로 콩나물과 김치, 고추장으로 비벼 먹었음) 더는 고추장 조달이 안 됩니다. 그러니 이번에 다른 곳으로 옮겨 주셨으면 해요”
정말 황당했다. 그 이유가 반드시 고추장 때문이었을까? 고추장 한 독을 다 먹은 죄로 결국 우리는 하숙집을 옮겨야 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일화가 있었다. 서울-광주-이천으로 이어진 국도는 원주로 가는 중심도로이면서, 이천이나 여주에서 충주로 가는 중요 도로이기도 했다. 충주에서는 그 무렵, 국가에서 심혈을 기울여 운영하는 충주 비료공장과 부속 공장들이 가동 중이거나 준공 과정에 있었다. 따라서 국빈들은 물론 거물급 사업가들의 왕래가 잦은 국도이기도 했다.
그 당시 우리 병사들의 식사는 군인의 밥그릇이라고 하는 반합에 보리 섞인 밥 한 그릇과 주로 호박이나 감자가 들어 있는 된장국이 전부였다. 가끔 고깃덩어리가 한두 개씩 들어있는 소고깃국이 배식되기도 했지만, 아주 운이 좋을 때나 한 개쯤 건져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열악한 식단이었다. 가끔 부대 회식이 있을 때나 고기와 술을 맛볼 수 있었다.
그러나 회식비용을 조달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편법을 써야 했다. 편법이란, 대낮의 적당한 시간에 도로공사 한복판에다 마치 고장이 난 것처럼 크랜 장비의 샤블(삽)을 내려놓고 정비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응급수리를 하면 오가는 모든 차량이 정차해야 했다.
그때 버스 안내양들이 재빨리 선임하사에게 약간의 막걸리 값을 집어주면, 그 샤블은 손쉽게 올라가서 버스들이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 가끔 그런 편법으로 회식비를 챙겨서 그날 저녁에 고기도 굽고 막걸리와 소주잔을 기울이며, 고된 하루의 피로를 풀게 해주면서 군인들의 사기를 높여주었다. 그렇게 슬슬 재미를 보다가 어느 날 아주 혼쭐이 나고 말았다.
그날도 우리는 회식하기로 하고, 크랜 장비의 샤블을 내려놓을 시간과 장소를 정했다. 도로 한가운데 샤블이 놓였으므로 양쪽으로 차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모습을 볼 수 있는 중간쯤의 언덕에 나는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양 끝에서 신호 병사들로부터 보고가 들어오도록 해놓았다.
그런데 아래를 내려다보니 양쪽에 서 있는 차들 사이의 비좁은 공간으로 새까만 지프가 중앙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벌떡 일어나 지프를 경계하고 있으려니 신사복 차림의 젊은 사람이 내게 다가와서는 다짜고짜로 “귀관이 여기 책임자야?”라고 묻는 게 아닌가?
“네, 그렇습니다.” 내가 당황하면서 대답했더니, 그 사람은 화가 치민 음성으로 “저기, 장군님 앞에 가서 현 상황을 보고하도록 하지?” 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겁이 났지만, 검정 지프 앞으로 다가섰다. 차 안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귀관이 책임자야? 왜 차량통과가 안 되나? 왜 빨리 처리가 안 되는 거야? 너…, 대대장이 누구야?” 나는 순간적으로 직감했다. 대체로 민간인들이 군인에게 반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 순간 가슴이 떨렸지만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에게 밀리면 큰일이었다.
“네, 현재 크랜 샤블의 볼트가 깨져서 새 볼트로 교체하기 위해 부대로 정비병을 보냈습니다. 부품이 도착하는 즉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중장비 부품을 교체해야 한다는데 누구든 기다리는 수밖에는 대안이 없는 법이다. 나는 다시 옆에 바짝 붙어 서 있는 정비 하사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야! 강 하사! 부대로 연락해봐. 볼트 부품이 어떻게 됐어?”
강 하사는 큰 소리로 대답했다. “네, 즉시 연락을 취해서 보고 드리겠습니다.”
나는 검정 지프에 앉은 이름 모를 장군님께 다시 보고했다.
“부품이 도착하는 대로 교환 작업을 서두르겠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셔야겠습니다.” 교환될 부품이 도착할 리 없었지만, 이 모든 과정이 배고픈 병사들에게 회식을 시켜주기 위한 시나리오에 불과한 것이었다.
나는 장군님 지프에 다시 보고했다. “샤블이 이제 막 정상 작동했습니다. 몇 분만 더 계시면 교통의 흐름이 정상화됩니다.”
얼마 후 지프는 사라졌고, 그날은 회식비가 없어서 몹시 아쉬운 밤을 보내야 했다. 한 달여 만에 회식을 기대했던 병사들에게 미안한 일이기도 했다.
경기도 광주에서의 부대생활은 병사들과도 가까이 지내고, 초급장교로서 많이 배운 시간이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