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인생사 호사다마라 했던가! 어느 날 아주 어려운 일이 생겼다. 새로 소대에 배치된 장 이병이 탈영해버린 것이다. 당시에는 탈영병이 발생하면 소대장이 먼저 책임을 지고 잡아오든가 처벌받게 되어 있는 구조였다.
기록카드를 조사해본 결과 서울 성북구 장위동에 집이 있고 누나 밑에서 성장했으며, 대학 1학년을 마치고 입대한 병사였다. 나는 그 일을 먼저 조 중위하고 상의했다. 조 중위는 당장 상부에 신고하지 말고 중대장한테만 보고하라고 조언했다.
내 보고를 받은 중대장은 장 이병을 잡으러 당장 서울로 가라고 명령했고, 나는 그 와중에도 서울로 가라고 하니 덕분에 잘된 듯싶었다. 나는 소대 강 하사(향도)를 데리고 급히 서울로 가서 묻고 물어 다행히 장 이병의 집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장 이병은 없고 할아버지가 나오셔서 “손자 녀석이 잠깐 들렀다가 옷만 갈아입고는 나가버렸어요.”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그날 하루 동안 잠복했지만, 탈영한 병사가 나 잡아가라고 들어올 리가 있겠는가? 우리는 이틀 이상 거기서 지체할 수가 없어 간단한 메모를 남겼다. “부대에서 소대장과 향도가 왔다 간다. 우리는 너를 당장 헌병대에 넘기지는 않겠으니 속히 귀대하기 바란다. 며칠 내로 귀대하지 않으면 헌병대에 신병처리를 요청하겠다.”
우리가 부대에 복귀하여 중대장한테 그 사실을 보고하니, 대개 일주일쯤 후에 가족들이 데리고 온다며 그때까지도 귀대하지 않으면 헌병대에 신고하자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장 이병이 탈영한 지 6일쯤 되었을 때, 나한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예쁜 여자 목소리였다. 자기는 장 이병 누나인데, 저녁을 미리 먹여서 장 이병을 인도하겠다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반가웠고, 원주역 부근의 음식점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찾아갔더니 원주에서 유명한 식당이었다. 방으로 안내받아 들어가니, 중년 여자 한 명만 앉아 있고 장 이병은 보이지 않았다.
반신반의하면서 서로 인사를 나눈 후, 장 이병의 누나가 “장 이병이 곧 올 테니 먼저 저녁 식사를 하시죠! 만약 장 이병이 안 나타나면 제 몸이라도 잡힐 테니 조금도 염려 마시고 맛있게 드세요!”라고 먼저 얘기를 꺼냈다. 들어보니 나는 잃을 것이 없었다. 자기 몸을 저당 잡힐 정도로 장 이병의 복귀가 확실해 보였고, 맛있는 음식이 한가득 차려져 있으니 시간을 즐기면 될 일이었다.
날씨도 몹시 추웠다. 처음에 맥주 한잔으로 입가심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기분이 더 좋아졌다. 장 이병의 누나는 계속 정종과 소주를 섞은 짬뽕 주를 나한테 마시게 했다. 얼마큼이나 마셨을까? 한순간 내 이마가 푹 내려앉더니 밥상과 유리컵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는 의식이 몽롱해지면서 옆으로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술 취한 내 눈에 방 천장이 좌우로 흔들리고 그 자리에서 소변을 볼 정도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천만다행이다. 옆에 쓰러진 나를 장 이병의 누나가 부축해 일으킨 것까지는 기억이 난다.
한참 후, 장 이병의 누나가 나를 택시에 태워 도착한 곳은 내 하숙집이었다. 내 숙소를 낮에 미리 알아두었던 것이다. 내가 만취한 상태로 하숙집에 도착하자마자 마루에 드러누우니 추운 겨울이라 빨리 방으로 옮겨졌다. 그런데 하숙집 아주머니와 장 이병의 누나 사이에 심한 말다툼이 시작되었다. 그 내용을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젊은 사람한테 술을 얼마나 마시게 했기에 옷에다 오줌을 쌀 정도냐며 하숙집 아줌마가 ‘당신은 동생도 없고, 인정사정도 없는 × 같은 년’이라고 마구 소리를 지르고 퍼부어대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그날 밤 하숙집 아주머니와 조 중위가 정성껏 간호해준 덕분에 새벽부터는 정신을 차렸고, 아침에 겨우 부대로 출근할 수 있을 만큼 정신이 맑아졌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장 이병이 소대에 들어와 있는 게 아닌가? 반갑기도 하고 극도로 화가 치밀기도 했지만, 일단 참고 기합은 며칠 후에 줄 목적으로 따로 불렀다. 그리고 탈영한 경위를 물었다. 장 이병의 사정을 들어보니 참으로 딱했다. 그는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누나 밑에서 자라며 학교도 다녔지만, 누나가 가장 역할을 하며 가계를 꾸려가야 해서 누나와는 대화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누나가 서울 퇴계로 국도극장 옆 골목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며 사람을 상대하는 사업도 해서 누나에 대한 불만이 잔뜩 쌓여 있었다.
외롭게 중·고등학교에 다니며 여러 차례 퇴학과 정학을 당했을 때마다 누나가 적절하게 해결해 준 전례도 들려주었다. 대학교 1학년 재학 중 입대를 했으나, 군 병영생활 역시 극복하기가 어려워서 신병 훈련할 때 탈영을 시도할 마음도 있었다고 했다. 이번에도 누나가 달래고 달래서 겨우 부대로 복귀하게 되었으니, 다시 기회를 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군 생활을 마치겠다고 약속했다.
기합을 주려고 불렀는데 내 마음은 오히려 더 복잡해졌다. 장 이병이 여기서 이보다 더 큰 사고를 저지르면 나도 무사히 군 생활을 마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즉시 장 이병을 배려하는 쪽으로 마음을 돌리고, 그 무렵 당번이던 정 상병을 장 이병으로 교체하기로 했다.
당번은 평상시 소대장의 개인 비서 역할을 했는데, 반합(군인들 밥그릇)에는 아침밥을, 반합 뚜껑에는 반찬을, 양재기에는 국 한 그릇을 담아 나르는 일을 했다. 또 본부 중대와 기타 참모 부서에서 메시지 받아오는 일도 했는데, 다른 병사들에 비해 단순한 업무였다. 그런데다 소대장과 농담도 할 수 있는 환경이라 어느 정도는 군부대 적응을 쉽게 할 수가 있었다. 장 이병을 당번으로 정한 내 의도는 그를 내 주변에서 맴돌게 하여 재탈영을 막아보려는 심사에서였다.
당번이 된 후 장 이병은 다행히도 상당기간 다른 병사들과 대화도 나누고, 심지어 신병들에게 상관 노릇까지 할 정도로 잘 적응했다. 그리고 장 이병에서 장 일병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서울 근처의 다른 부대로 전속되어 버렸다. 사병들이 타 부대로 전속 가는 일은 그리 흔한 경우가 아니었다. 틀림없이 장 이병의 누나가 또 무슨 수를 쓴 듯하였다.
서울 근처의 부대로 떠나기 전날 밤, 나는 장 이병에게 그의 누나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미 언급했지만, 장 이병의 누나는 서울 퇴계로 국도극장 옆 골목에서 아주 큰 식당과 또 다른 사업체를 운영하는 여사장이었다. 중년의 여자가 그렇게 큰 식당과 기타 사업을 하는 것으로 봐서는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지나는 동안, 우리 부대는 원주지역에서 경기도 광주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