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좀 불안했지만 군대는 명령이라고 배웠기에, 나는 즉시 다른 곳으로 떠날 준비를 하였다. 새 임지는 강원도 횡성에 위치한 제○○○ 공병부대였다.
이 부대 역시 최전방에 속하는 지역에 있었다. 지프와 덤프트럭의 중간형인 쓰리쿼터 짐칸에 타고 달려 저녁 늦게야 새로운 부대에 도착했다. 나를 태워 온 수송장교 윤 중위는 주번사관 신 소위에게 나를 인도하고는 어디론가 가버렸다. 신 소위는 육군 간부 후보 출신으로 1년 전에 임관했고, 당직 주번사관으로서 간략한 신원조사를 했다. 신 소위는 다정하게 대화하며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이른 아침, 병사들의 우렁찬 소리에 밖을 내다보니 부대 바로 앞에 전투비행장이 있었고, 헬리콥터 몇 대와 소형비행기(L19?)들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어 그곳이 최전방임을 금세 실감할 수가 있었다.
오전에 부대 업무 시작과 동시에 행정과(S1)에서 간단한 신고 절차를 마치고, 이제는 정식으로 대대장에게 신고식을 치르기 위해 지휘소(CP)로 들어갔다.
“신고합니다. 소위 임남웅은 ○○○○년 ○○월 ○○일부로 ○○○대대 전속을 명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대대장은 아주 작고 마른 체구에 야전복 차림의 육군 중령이었는데 신고 받는 자세가 매섭고 당당했다(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이분은 나중에 별을 달고 공병감으로 퇴역했다).
신고식을 마치고 배치된 곳은 제3중대 제4소대장이었다. 소대장 당번이라는 정 상병이 옆에 바짝 붙어 서서 짐을 챙겨주고 간단한 소모품도 전해주었다. 내가 짐을 다 풀기도 전에 소대원들이 기거하는 막사에 들어서니, 소대원 전원이 침상 위에서 점호 받는 자세로 서 있었다. 새 소대장을 맞이한 소대원들은 긴장된 분위기가 역력했고, 나는 갑자기 사령관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개인 침상정리를 포함해 주변이 깔끔하게 정돈된 것으로 보아 가장 가깝게 지내며 호령하는 소대장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느껴졌다
.
선임하사(박 중사?)가 점호 보고를 했다.
“제3중대 제4소대 정원 ○○명, 휴가 ○명, 외출 ○명, 현재 ○○명 이상 무!” 선임하사로부터 소대 현황 보고를 받고 특별히 지적할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대로 지나칠 수는 없는 것이 관례인 만큼 내 소개 겸 정신 훈화를 했다. “본관은 학군단 출신으로…. 앞으로 소대원들의 협조를 바란다. 이상!”
그들의 자세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긴장되어 있었다.
내가 임시로 기거할 숙소인 주번 사관실에 침상이 정리되어 있었다. 당번(전쟁 시에는 전령)이 옆에 바짝 붙어서 모든 일을 도와주었다. 더운물, 세면 후에 사용할 수건 등등. 태어나서 그렇게까지 대우받는다는 사실에 나 자신이 대견스럽기도 했다. 장교 중에서도 가장 말단인 소위가 이 정도라면, 더 높은 계급들은 도대체 어떤 대접을 얼마나 받을 수 있는지, 새삼 군대 사회의 위계질서에 대해 생각해보며 내가 장교라는 사실에 처음으로 긍지를 느꼈다. 정 상병의 도움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전입신고차 중대장실로 들어갔더니 너무나도 인자하게 생겨 군인 같지 않은 인상의 대위(지금 기억으로는 이숭이 대위)가 나를 맞았다. 중대장 옆에는 다른 소대장들도 배석하고 있었고, 중대장은 각 소대장을 소개해주었다.
제2소대장, 제3소대장 모두 ROTC 출신으로 김해 공병학교에서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제2소대장은 전북대, 제3소대장은 동국대 출신이었는데, 어찌 보면 모두 친구였다.
제1소대장은 어젯밤 주번사관으로 나를 맞아준 신 소위였다. 4명의 소대장끼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온 사이처럼 친밀해 보였다.
제4소대의 임무는 원주에 있는 1군사령부의 여러 가지 건설 보수공사를 지원하는 일이었다. 예를 들면, 도로 보수와 군인 막사 보수, 공병부장(대령)실에서 명령하는 기타 일들을 도맡아 하는 것이었다.
우리 부대에 일일 작업지시를 내리는 작전과 보좌관 조동헌 중위는 한국외대 영어과를 졸업한 간부 후보 출신으로 3년째 군 생활을 하고 있는 선배 장교였다. 조 중위는 매우 다정했고, 부대 내에서의 어려운 일이나 모르는 일들을 친구처럼 잘 이끌어주고 챙겨주었다.
부대생활을 시작한 지 두어 달쯤 되던 무렵에 조 중위가 먼저 말을 꺼냈다.
”임 소위, 하숙집을 구할 생각이면 내 하숙집에 같이 있지?”
그 당시 장교들은 당직자들 외에는 대부분 부대 영외지역에서 출‧퇴근하고 있었다. 나는 흔쾌히 조 중위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렇게 조 중위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조 중위와 같이 기거한 하숙집은 원주시 명륜동에 있었는데, 부대 출퇴근 차를 이용했기 때문에 비상시나 당직하는 날 외에는 원주에서 생활했다.
하숙집 아주머니는 40대 중반의 과부였고, 남편은 원주 H 고등학교 교감으로 재직하다가 갑자기 사망하여, 고등학교 다니는 아들 한 명을 데리고 장교들 하숙을 치며 살고 있었다. 조 중위와 내 하숙비를 받아서 아들 학비 대고 겨우 생활비로 충당하는 듯했다.
작은 골방은 아들 주고, 아주머니가 쓰시는 안방과 하숙방은 미닫이문으로 막혀 있었는데 조용한 밤이면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거의 큰방 하나로 보아도 될 만큼 가까웠다. 하숙집 아주머니는 식사준비를 성의껏 해주시고 세탁까지 해주신 정말 좋은 분이었다.
조 중위는 나보다 2살 많고 계급도 높았지만, 같은 방을 사용하고 같은 밥상에서 함께 식사하고 부대에서 잠깐 따로 일보다가 퇴근도 함께하고, 서울 갈 일 있으면 동행도 하다 보니 친해져서 나중에는 서로 말을 트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부대에서도 엉겁결에 반말을 하다가(조 중위도) 작전과장 이 대위로부터 주의 경고까지 받을 정도였으니까….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하숙집 아주머니는 나부터 챙겨주곤 하셨는데, 임 소위는 조 중위 동생 같아서 그런다며 농담도 하셨다. 하숙집에서는 아주머니가 이것저것 보살펴 주시고, 부대에서는 조 중위가 뒤를 봐주고, 소대에서는 당번병이 챙겨주던 군 생활…. 아! 너무나도 행복한 날들이었다.
게다가 월급은 꼬박꼬박 제날짜에 들어오고 있으니 ‘차라리 장기복무를 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