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11월 15일부터ㅓ 21일까지 소울 소공동 입구에 있던 중앙공보관에서 <철농 이기우(鐵農 李基雨) 서예 · 전각전>이 열려 화제가 되었다.
나는 철농과 각별하게 지내는 사이여서 작품 진열을 하는 14일 오후에 전시장인 중앙공보관에 들렸다. 작품진열이 거의 끝나 나오려고 하는데, 철농이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끝내고 같이 가서 한 잔 하자는 얘기였다. 철농은 술자리만 벌리면 으레 2차, 3차까지 연장하는 버릇이 있어 그 날도 1차라는 단서를 붙이며 응한 것이다. 무교동에 가서 한잔 기울였다.
어지간히 됐다싶어 일어나려고 했더니 막무가내였다. 예의 주벽이 발동, 2차를 가자고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무조건 택시를 같이 타고 종로통으로 가자고 했다. 철농은 노고산동에 살고, 나는 혜화동 관사에 살 때여서 방향이 맞지 않았다. 나는 그를 먼저 내려주고 집에 갈 작정으로 신촌 쪽으로 가자고 했더니 택시 운전사에게 호통을 치며 자기 가자는 대로 가지 않으면 혼내주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어쩔 수 없이 철농을 따라 단성사 앞 중국요리집 열빈루(悅賓樓)까지 끌려갔다. 어찌 그리 식성도 좋았던지 여기서도 중국요리를 시켜놓고 배갈을 마셨다. 그는 이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또 3차를 가자는 것이다. 나는 정색을 하고 ”이 사람아, 내일 전시장에 대통령이 나오신다면서..... 입에서 술 냄새나 풍길텐가“하고 말렸지만 들은 척도 않고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나는 할 수 없이 끌려갔다. 가면서 어떻게 하면 빠져나갈까 하고 궁리했다. 나는 상당히 취해 어디로 가는지조차 알아내기 힘들었다. 어느 방석집에 들어가서 또 술상을 봐오라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이윽고 술상이 들어오고 분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는 철농이 권하는 대로 술상을 받아놓고 변소에 간다고 빠져나왔다. 아가씨가 따라 나왔다. 그에게 아까 길에서 산 초콜렛을 쥐어주고 조금 있다가 저 손님에게 내가 먼저 갔다고 알리고 그 분도 집에 가시도록 도와드리라고 일러놓았다. 시계를 보니 열두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통금시간 직전이다. 차가 없어 걸어서 돈화문 앞에 오니 통금 시간이 지나버렸다. 나는 원남동 파출소를 피해서 이화동으로 넘어 집에 왔다.
이튿날 전시장에 갔더니 방금 이 대통령이 돌알보고 간 직후였는데, 철농은 나를 보고 힐쭉이 웃으며 ”술집에서 자고 나와 손도 못 씻고 대통령과 악수했다“고 털어놓았다. 철농의 전시회는 대성황이었다. 서예 54점, 전각(篆刻) 18점을 내놓았는데 평도 좋았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의 사인(私印), 서화가들의 아호(雅號), 도장과 유인(流印)이 전시되어 눈길을 끌었다.
지금 내가 아껴쓰는 ’백수노석실(白水老石室))‘이란 도장은 철농이 술상을 앞에 놓고 술을 마시면서 즉석에서 판 것이어서 더욱 멋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