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암 이응노(顧菴 李應魯)는 1904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19세까지 홍성에서 집안 살림을 돕다가 상경,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문하에 들어갔다. 해강 문하에서 공부할 때 그는 죽사(竹史)라는 호를 썼다. <선전>에도 ‘묵죽(墨竹)’을 출품하여 몇 차례 입·특선했다. 그 이전 한때 전주에서 개척사(開拓社)라는 간판집을 내고 그림 공부도 하면서 식생활도 해결했다.
그는 1935년 동경에 건너가 일본 남화(南畫)의 대가인 마쯔바야시 케이케쯔[松林桂月]를 찾아가 제자가 되기를 청했다. 그러나 마쓰바야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고암은 해강에게서 공부하던 그림 보따리를 몽땅 들고 가 마쓰바야시의 집 대문에서부터 현관까지 깔아놓고 허리를 굽히고 서 있었다. 행여 그림이 바람에 날릴세라 돌로 눌러놓은 채 마쓰바야시의 반응을 기다렸다.
고암의 행동이 범상치 않았던지 마침내 마쓰바야시가 나와 보았다. 고암은 마쓰바야시가 나오자 “저는 조선의 해강 문하에서 그림 공부를 하다가 온 이응노인데 새로운 그림 공부를 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하고 간곡하게 말했다. 그림을 살펴본 마쓰바야시는 고암의 성의에 감복했는지 제자로 받아들였다는 일화가 있다.
고암은 이처럼 매사에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이다. 해방 후 그는 회현동에 있는 큼지막한 적산가옥에 살았는데 자주 들른 친구는 소전(손재형)과 제당(배렴). 나도 가끔 끼었다. 그는 그때 이화여대 강사였으며 개인지도도 했다. 파리에서 함께 살았던 부인 박인경(朴仁京)도 그때 고암에게 그림공부를 하던 여대생이다.
고암은 부지런하고 그림도 다작이어서 언제든지 화살에 습작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잠이 없어 밤에도 그림을 그렸는데 자정 무렵에 서너 시간 눈을 붙이고 새벽에 일어나 장작을 패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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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암 이응노(顧菴 李應魯 [사진출처 : 가나문화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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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목포의 남농 허건(南農 許楗)과도 각별하게 지내 남농이 서울에 올라오면 으레 어울렸다. 어느 해 가을 <국전>이 열려 있을 때인데, 남농이 상경하여 나는 소전, 제당, 고암 등과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다. 그날의 스폰서는 또 은행 지점장이었다. 다동 어느 요정에 초대되어 술이 한 순배 돌아갈 무렵, 고암은 벌써 흥이 나 있었다.
살펴보니 방 한 켠 상 위에 어느새 마담이 지필묵(紙筆墨)을 준비해놓고 석상휘호를 받을 눈치였다. 소전이 먼저 붓을 들어 글씨를 쓰고 고암, 제당이 그림을 그려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이때 눈치 빠른 마담이 장구를 치다말고 내실로 들어가더니 흰 속치마를 한 장 들고 나왔다. 신이 난 고암이 그것을 받아 북통 위에 걸쳐놓고 붓을 휘둘렀다. 소전이 화제(畵題)를 어떻게 썼으면 좋겠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거 있잖아... 술 취한 객이 비단치마를 잡으니 / 비단 치마가 어이 없이 찢어지누나 / 비단치마 한 벌 찢어지는 건 아깝지 않지만 / 다만 두터운 정이 끊어질까 두렵소이다 말이야”하고 부추겼더니 소전이 무릎을 치면서 일필휘지해서 치마폭 합작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그때는 요정을 하는 마담 중에 이런 멋이 있는 사람이 종종 있었고 서화가들도 허물없이 응해주곤 했다.
고암이 유럽에 갈 때는 주한 서독대사 헬스 씨가 도와주었다. 헬스는 미학을 전공한 사람이어서 남달리 미술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한국에 있는 동안 미술에 흥미를 갖고 박물관은 물론 각종 전람회도 틈나는 대로 찾아다녔는데 고암과도 지면이 있어 유럽 진출의 길을 터준 것이다.
고암은 술자리에 앉기만 하면 “우물 안 개구리처럼 이 좁은 나라에서 큰 소리 칠게 아니라 넓은 바닥에 나가서 활동해야 한다”고 열을 올렸다. 고암의 목표는 프랑스 파리였으나 헬스가 독일 행을 권했기 때문에 먼저 서독 본(Bonn)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가 본에 내렸을 때 그의 수중에는 여권 뿐 무일푼이었다고 한다.
이때 서독 대사 손원일(孫元一) 씨 부인이 미술에 취미를 가지고 있어서 고암을 도와주었다. 손 대사 부인은 백방으로 주선해서 그가 파리에 갈수 있도록 비행기표와 얼마간의 생활비를 마련해주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고암이 꿈에도 그리던 파리 진출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 고암이 '백건우(白建宇) 윤정희(尹靜嬉) 납치 미수사건'에 관련되었다는 신문기사를 읽고는 세상일이란 참으로 예측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