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당 배렴(霽堂 裵濂) 1911년 경북 금릉군 조아면 신안동에서 배선벽(裵善壁) 씨의 4남 5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금릉에 있는 청년회관 중등과에 입학, 2년 과정을 마치고 17세 되던 1928년에 서울에 올라와 외조부 댁에 유하면서 18세 되던 29년부터 청전 이상범 화숙에 다녔다.
청전 문하에 들어간 1년 뒤인 30년 10회 <협전>을 출발로 해마다 <선전>과 <협전>에 출품했다. 제당은 36년 15회 <선전>에 ‘요원(遙遠)’으로 초특선 하고 43년 22회 <선전>에서 ‘산전(山田)’으로 두 번 째 특선을 하며 화명(畫名)을 얻었다.
청전의 영향 하에서 청전풍의 그림을 그렸으며 41년부터 43년까지 <청전화숙 동문전>을 통해 그룹 활동도 했다. 해방 다음 해에 손재형, 김기승, 이응노, 이기우, 김영기 등과 ‘조선서예동연회(朝鮮書藝同碾會)’를 조직했고, 같은 해 제당은 나와 이유태, 이응노, 김영기, 조중현, 정진철, 조용승 등과 함께 <단구(單丘)> 미술전을 만들어 3월에 창립전을 열기도 했다.
제당은 체구가 작고 생김새부터 얌전하고 조용했다. 말 소리도 나직나직 했는데 보기보다는 활동적이고 사교적이어서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그만큼 면이 넓어 친구가 많았다. 함께 거리를 걸어가면 몇 사람 씩 아는 사람을 만나기가 일쑤다. 상대방이 속 모르고 지나쳐도 먼저 아는 체를 하면서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는 다정다감한 사람이다.
그는 안국동 윤보선(尹潽善) 댁 뒤에 살았는데, 선비 취미로 방에 서화도 걸고 수석(壽石)도 좋아해서 수석에 관한 이야기를 올려놓고 친구들이 오면 자랑스레 보여주곤 했다. 차는 누가 오든 녹차를 대접, 다도를 일깨웠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고집부리지 않는 부드러운 성격 탓으로 많은 사람과 마찰 없이 잘 어울렸다. 안국동 그의 집에 자주 드나들던 사람은 사진작가인 백오 이해선(白烏 李海善)과 고암이었다. 그와 친하지 않은 사람이 없지만 특히 고암, 소전과는 각별한 사이다. 고암은 제당 집에 오기만 하면 술 내오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술은 입에도 못 대는 사람이지만 제당은 두말 않고 술상을 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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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당 배렴(霽堂 裵濂) [사진출처 ; 임응식아카이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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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술 못하는 샌님(제당)에게 억지로 술을 먹였다가 당황한 일이 있다. 반도호텔 뒤에 있는 어느 일식집으로 기억되는데, 아마 상문당(尙文堂) 주인 박봉환(朴鳳煥)과 청당 김명제(靑堂 金明濟) 그리고 내가 자리를 함께 했던 것 같다. 우리 셋은 술을 그런대로 하는 편이어서 떠들며 마시는데 제당은 별 이야기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옆에 아가씨들이 앉아 있었지만 손 한번 안 잡고 농담도 없이 글 읽는 선비처럼 몸을 좌우로 흔들며 조용히 앉아 있었다.
우리만 즐기는 것 같아서 내가 제당에게 “한 잔 하고 기분을 좀 내봐” 하고 한잔 권했다. 남의 호의를 거절하지 못하는 제당은 마지못해 잔을 받아 몇 모금 마셨다. 그런데 조금 후에 보니 제당은 얼굴이 창백해져서 그 자리에 드러누웠다. 우리는 무리하게 술 권한 것을 후회하고 일찍 술자리를 파했다. 그는 이렇게 맥주 한잔에 넉 아웃될 정도로 술에 약한 사람이다.
제당은 원래 심장이 약한 사람인 것 같았다. 어느 해인가 <국전> 심사 중에 점심을 하러 나와 함께 중앙청 식당에 내려가 식사를 마치고 심사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천천히 걷는데도 숨이 차서 “색색” 소리를 낼 정도였다. 그가 갑자기 타계한 것도 다름 아닌 심장관계였던 것 같다.
예술원에서 <국전> 심사위원을 천거하는데 그가 몇몇 회원들의 구두 추천을 받아 명단을 작성하다가 실수를 했다. 모 원로 회원이 누구를 쓰라고 추천하였는데 안 쓰고 망설였다.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자지가 생각해 둔 사람을 써 넣었다고 한다.
이 일 때문에 그 원로회원이 제당에게 삿대질을 하며 언성을 높여 다그치는 바람에 쇼크를 받은 모양이다. 당당히 맞서서 자기 생각을 피력했으면 응어리가 풀렸을 것을 워낙 심약해서 싫은 소리를 그대로 다 듣고는 화를 참지 못해 속으로 울화가 터진 것 같았다.
예술원 회의를 마치고 광화문에 있는 귀거래 다방에 가서 소전, 시암과 함께 커피 한잔씩을 하고 헤어졌는데, 그날 저녁에 심장마비를 일으켜 세상을 떠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