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당 백윤문(香塘 白潤文)은 후소회 회원 중 최고참이다. 나보다 여섯 살이나 위여서 늘 형처럼 대했다. 그는 1932년 이당 문하에 들어가 1941년 제4회 「후소회전」을 끝으로 기억상실증을 일으켜 1977년 8월 다시 붓을 잡을 때까지 35년간 깊은 겨울잠을 잤다.
사람들이 향당의 삶을 가리켜 한국판 ‘마음의 행로(行路)’라고 한 것은 그가 정신분열증을 일으켜 옛날 일을 모두 잊고 ‘화필의 동면(冬眠)’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홀연히 잠에서 깨어나 붓을 들었고 1978년 9월에는 서울 신문회관에서 개인전까지 열어 사람들이 기적이라고 일렀다. 그러던 그가 재기 3년 만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인생사 무상을 실감한다.
향당은 오원 장승업(吾園 張承業), 홍세섭(洪世燮), 정학교(丁學敎) 등과 함께 19세기를 빛낸 화가 향석 백희배(香石 白禧培)의 친손자다. 향당 집안에는 향석과 그의 8촌 형인 임당 백은배(琳塘 白殷培)가 있었다. 임당은 도화서(圖畫署)의 화원(畫員)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해상군선도(海上群仙圖)>와 대기도(對碁圖)> 등의 풍속도 화첩을 남긴 당대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향당이 그림공부를 시작할 때 한의사였던 부친 백필용(白弼鏞) 씨가 향당 조부의 아호인 향석(香石)에서 ‘香(향)’ 자를, 방조(傍祖)의 아호인 琳塘(임당)에서 ‘塘(당)’ 자를 따, 가통을 잇는 훌륭한 화가가 되라는 뜻으로 ‘향당(香塘)’이라 작호했다고 한다.
향당이 서울 교동초등학교 근처에 살 때 몇 차례 놀러간 일이 있다. 규당(한유동), 취당(장덕)과 내가 놀러 가면 그는 “어, 왔어”하고는 한약방과 붙어있는 문간방으로 안내했다. 향당은 과묵한 사람이다. 방에 앉아서도 뭘 물어보면 한두 마디 대답뿐 별말이 없었다. 나이 차도 있었지만 우리하고는 잘 어울리지 않았고 같은 또래인 동강 정운면(東岡 鄭雲葂)과 일관(이석호) 등과 가까이 지냈다.
송강 정철(松江 鄭澈)의 12세손인 동강은, 광주(光州)에 내려가 2년간 살고 있던 소정에게서 그림공부를 시작, 서울에도 내왕하면서 향당과 교분을 나눴다. 동강은 20세 때 <묵매(墨梅)>로 5회(1926년) 「선전」에 특선하고 3년 후인 1929년 8회에 <산수(山水)>로 또 한 번 특선을 보탰다.
1942년에는 일본 「문전(文展)」에도 입선하여 꽤 이름을 날렸지만 1948년에 개인전을 준비하다가 복막염으로 중단, 광주에 내려가 42세를 일기로 짧은 일생을 마쳤다. 일관은 그림보다는 글씨에 더 뛰어나 「협전」에서도 서예작품이 입선할 정도였다.
향당은 27년 6회 「선전」에 <춘일(春日)>로 초입선하여 화단에 데뷔했다. 그 후 연 5회 입선하고, 1932년 11회 「선전」에 <촉규(蜀葵)>가 특선을 받아 기염을 올렸다. 이어 13회에 <어사휘도(漁師揮圖)>가 특선하고, 15회에 <위진팔황(威振八荒)>이 특선에 올라 16회에는 <산승(山僧)>을 무감사 출품했다. 18회에는 <건곤일척(乾坤一擲)>을 내서 특선을 얻었다. 향당은 1939년부터 41년까지 3회에 걸쳐 「선전」 특선 작가전에도 출품했다.
그러나 향당은 「선전」 최고상인 창덕궁상(昌德宮賞), 총독상도 받았지만 연 4회 특선, 10년 동안 여섯 번의 특선 횟수를 채우지 못해 추천작가가 되지 못했다. 항간에는 그가 몹쓸 병을 얻게 된 연유가 「선전」에서의 좌절 때문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낚시질하는 사람을 그린 <수조(垂釣)>가 1940년 19회 「선전」에 특선후보로 올랐다가 입선에 머무는 바람에 더욱 실망이 컸던 것 같다. 실력으로나 경력으로나 마땅히 특선으로 뽑혀야 할 <수조(垂釣)>가 어이없게도 입선에 그쳐 큰 쇼크를 받았던 게 아닌가 싶다.
향당이 잠에서 깨어 화필을 다시 잡았을 때는 자부(子婦)의 정성이 대단했다고 들었다. 그가 기억을 되찾은 3년간(1978~80)은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마지막 작업을 할 수 있었다는 데 큰 뜻이 있다. 한 작가에게 있어 말년작이란 어떤 의미로든 중요한 것이다. 향당의 「선전」시대 작품과 재기 이후의 작품은 사뭇 다르지만 하나로 이어지는 화맥을 찾을 수 있다.
그가 타계한 후 아들(白松彬, 백송빈)과 며느리가 합심하여 미국 워싱턴에서 추모전을 열었고, 82년 9월에 아들이 경영하는 백송(白松)화랑에서 「향당 회고전」이 열렸으며, 화집까지 발간되어 그의 화업(畫業)을 기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