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체육회장과 대한올림픽위원장으로 취임하면서, 민족의 얼과 함께 한 90년 전통의 한국 스포츠 역사가 흔적이 없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한국 체육의 오늘이 있기까지 그 뿌리가 무엇인지, 선배 체육인들이 무엇을 했는지, 우리 후배들에게 남겨 줄 것이 무엇이며 우리가 어떤 길을 걸었는지 알려줄 실체가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스위스 로잔에 있는 IOC 박물관처럼 박물관 건립을 생각했다.
’85년도에 대한체육회가 뿌리 찾기 운동을 전개한 것을 알았다. 산재되어 있는 한국 체육의 유물과 유산들을 전국에서 수집하려고 했는데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흐지부지 끝나 그때 모아놓은 사료들이 창고에 처박혀서 빛을 못 보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즉시 체육박물관 계획 수립을 지시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사료들을 다시 모으고 가치 있는 것을 정리하라고 했다. 그러나 사료 모으기가 간단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큰 가치가 되고 기념이 될 만한 물건들을 선뜻 내놓을 사람이 그리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할 것 같았다. 30년을 넘게 모아 온 내 기념물과 사료들을 전부 내놓았다. 그 전까지 사료들이 대부분 국내 역사와 관련이 있었다면 내가 내놓은 자료들은 한국 스포츠 세계화의 역사였다. 태권도 관계 자료도 같은 취지로 국기원에 기념관을 만든 후, 전부 내놓아 앞으로 태권도 박물관을 만드는 기초가 되게 했다.
’96년도에 드디어 작지만 선수촌과 올림픽회관에 전시실을 설치했다. 그러나 90년 역사에 걸맞은 한국 체육의 역사를 담기에는 그릇이 너무 작았다. 누구나 올 수 있도록 접근성이 좋고 좀 더 크고 위용 있는 박물관이 필요했다. 다행히 삼성에서 내 뜻에 적극 동조해 1억5천을 지원해 주었다. 체육회 예산 1억 5천을 보태 총 3억 원의 돈을 들여 폐허나 다름없는 무교동회관 3, 4층을 개조했다. 입구도 예쁘게 단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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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체육회 후원의 밤(1998.) / 왼쪽 둘째부터 신낙균 문화관광부 장관, 필자, 김종필 국무총리, 조세형 새천년민주당 대표, 민관식 대한체육회 고문, 박세직 한일월드컵 조직위원회 위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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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4월 무교동 회관 3층에 약 200평 규모의 첫 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입구에는 한국체육박물관이라는 아치(Arch)도 세웠다. 2,400여 점의 자료들이 예쁜 장식장에 담겨 관람객을 기다렸다. 고종 황제의 칙서, 이승만 박사의 서신, 1948년 런던올림픽선수단 여비모금 채권, 한강 얼음 위에서의 검은 치마 입은 여학생의 스케이트 경기 사진, 손기정 선수의 월계관, 황영조 선수의 선서 발주물 등 자랑스러운 기념품이 많았다. 그것만 가지고도 모자라 4층을 다시 개조해 200평을 더 추가했다. 400평 규모의 체육박물관, 어느 정도 박물관의 틀도 잡히고 일반인에게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놓았다.
배순학 KOC부위원장을 관장으로 임명화고 박물관 발전의 기틀을 잡게 했다. 사마란치 IOC위원장을 비롯 많은 외빈들도 방문했다. IOC에서도 자료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국 체육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 더 많은 자료들을 발굴하고 수집해야 했으며 앞으로의 역사를 보존할 공간도 더 필요했다. 체육박물관을 무교동으로 결정한 것도 1966년 개관한 체육회관의 역사적 의미를 고려한 것이었다.
사실 무교동 체육회관은 이미 낡을 대로 낡았지만 체육인들의 정신적 요람이며 지주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건물은 재정이 가능할 때 개축할 수 있다.
당시 체육회관은 대한체육회 수익사업의 일환으로 임대를 내주었었는데 아무리 돈을 많이 번다고 한들 역사적 가치를 따라잡을 수 있겠는가. 임대가 끝나는 대로 박물관을 넓혀 도서실, 영상실, 휴게실 등도 만들 계획이었다.
안타깝게도 모 체육회장이 6억원의 월세를 받을 목적으로 무교동 체육박물관을 폐쇄하고, 지금은 태릉선수촌 국제스케이트장 2층으로 옮겨 명맥만 유지된다고 들었다. 아무런 상의도 없었다. 다행히 국민체육진흥공단(이사장 이창석)에서 국립체육박물관을 건립한다고 노력하고 있다. 낭보에 그치지 말고 체육인 모두 협조하기를 바란다.
대한체육회장과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은 무보수 비상근 명예직이지만 한국 스포츠의 콘트롤 타워(Control Tower)로서 뛰어난 전문성과 국제적 식견, 어학이 요구되는 자리다. 또 체육회의 미래를 위해 부가가치가 증가하는 방향으로의 통치(Governance) 능력이 요구 된다. 가장 명예로운 자리 중 하나일 수도 있지만 전문적인 지식과 노하우가 없다면 90년 역사의 한국 스포츠는 후퇴할 수밖에 없게 된다. 지금은 어떤가?
내가 대한체육회장과 대한올림픽위원장의 중책을 맡게 된 것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40년이 넘는 체육계에서의 봉사와 헌신, 전문적인 경륜과 수많은 IOC, 국제연맹, 각국 NOC, 신문방송 및 선수 임원 등 체육 인사들과의 우정, 외국인을 능가하는 다국어 구사(6개국어), 국제정보, 비전과 통치(Governance) 능력이라는 자산을 갖추고 나름의 책임감, 사명감을 가졌던 것이 바탕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