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사람들은 나와 사마란치와의 관계를 매우 친하고 우호적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마란치와 나는 ’86년부터 계속해서 올림픽 운동 증진과 IOC의 재정 자립을 위해서 함께 일해 왔기 때문이다. 88서울올림픽 준비 때는 IOC조정위원회(Coordination Comission)가 없을 때라 문제가 생겼던 경기스케쥴, TV방영권 교섭, 냉전 문제로 어려웠던 소련권 참가, 남북 동시개최 문제 등을 IOC위원장과 내가 매일 직접 협의하였고 친숙한 관계가 됐다.
나도 사마란치가 현대 올림픽을 인류 최대의 제전으로 키우고 IOC의 재정을 든든하게 한 공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사마란치는 백인이고 나이는 80을 넘었지만 아직도 권좌에 대한 미련이 여전한 사람이었다. 프랑코 독재 권력에 협조했던 사마란치는 시대가 변하면 그 시대에 맞춰 권력과 돈을 향해 움직인 기회주의자 중 하나라고도 할 수 있다.
나는 이런 사마란치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기에 출마 결심을 통보하러 로잔에 갔을 때 사마란치 위원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위원장으로서 모든 문제에 초월하고 중립을 지키며 남은 임기 동안 최선을 다한다면 역사상 가장 훌륭한 IOC 위원장이 될 것입니다. 위원장이 나를 지지하거나 중립을 지키면 내가 선거에서 이길 것이고 반대하면 이기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자 사마란치는 "IOC 위원장 후보 다섯 사람 중 당신만이 나의 유일한 친구다“고 하면서 나를 끌어안았다.
최소한 사마란치가 중립만 지킨다면 나는 투표에서 이길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사마란치는 결국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안팎으로 역공세를 폈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결정적인 원인은 사마란치가 내게 요청했던 여러 가지 사항에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한다.
사마란치는 퇴임 후 자기의 지위 보장과 아들을 잘 부탁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명예위원장에 추대될 것이고 로잔느의 박물관 이사장으로 추대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사마란치는 다시 한 번 자기 아들을 잘 봐달라고 하면서 부탁한 바 있다.
사실 사마란치는 제112차 모스크바 IOC 총회에서 올림픽 헌장을 바꿔 명예위원장을 종신제로 하였다. 또 일본 등의 국가로부터 스폰서를 받아 수억 달러를 들여 지은 올림픽 박물관을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꾸고 이사장에 취임했고, 기념사업위원회 위원장을 계속 맡았으며 명예위원장으로서 스페인과 로잔 두 군데에 사무실을 유지하고 직원, 차량 지원과 위원장과 동급의 판공비를 받도록 IOC 집행위원회에서 통과시켰다. 나중에 로게는 그 결정을 무시해버렸다.
IOC 집행위원회가 위원장 선거 직전에 마지막으로 총회 휴식시간에 이 문제를 논의하는 동안에도 사마란치는 로비에서 로게를 지지하는 최종 지령을 내리고 있었다. 물론 집행위는 사마란치의 요구를 통과시켰는데 이런 것들은 전임 위원장의 예우 차원에서 그렇다 치더라도 모스크바 IOC총회 때에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주문을 서슴지 않았다. IOC위원에 의한 후보 지지 성명 발표 불가, IOC위원 방문 금지, IOC위원 초청 금지, 후보의 정견 발표 금지, 사마란치는 매일 밤 위원들을 방으로 불러들이거나 직접 전화로 지령을 내린다는 것이 외신기자들 말이었다.
시드니 올림픽은 올림픽 사상 남과 북이 처음으로 개회식에서 공동 입장을 하여 전 세계에 뜨거운 감동을 선사한 대회다.
사마란치는 남과 북이 합의를 도출하자 미리 발표를 못하게 하고 본인이 발표한다면서 나와 장웅 북한 IOC 위원을 대동하고 남북 공동 입장을 IOC 총회 개회식 직후 내외신 기자들에게 발표했다.
그 전에 사마란치는 나와 장웅 IOC 위원에게 남과 북이 합의한 한반도기 대신에 올림픽기를 들고 가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북한은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것은 7천만 민족의 염원이고, 남북 평화통일의 물꼬를 트는 역사적인 순간인데 남과 북이 하나임을 상징하는 한반도기 외에는 들고 갈 수 없다고 말했다.
사마란치는 다음날 아침에 갑자기 자신의 방으로 나를 불러 남과 북 기수가 두 명인데 한 명은 한반도기를 들고 한 명은 ⌜Thank you IOC⌟라는 기를 들고 갈 것을 제안했다. 그래서 나는 “어린애 같은(childish) 수작은 안 부렸으면 좋겠다”고 말하면서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자 한발 후퇴하면서 매우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속으로 ‘⌜Thank you IOC⌟를 받아들이면 곧 「Thank you samaranch」로 해달라고 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어서 나는 사마란치에게 말할 것이 있다고 강변했다. 나는 “한국은 인구 7천만에 세계 10강에 들고, 올림픽에 400여 명의 선수단이 참가하는 스포츠 강국이며, 세계 11위의 경제 강국인데 선수 4명에 인구 80만에 지나지 않는 동티모르나 유고의 헤르체고비나 등과 똑같이 한국을 언급할 때마다 갖다 대지 말라고 했다.
아마 사마란치는 남북 공동 입장, 동티모르 문제, 유고의 헤르체고비나들을 엮어서 IOC를 노벨 평화상 후보로 올려놓아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 같았다.
여기에서 기분이 틀어졌는데 남과 북이 공동 입장을 해야 하는 데 있어서 같은 유니폼을 입는 경비에 대해서 또 한 번 의견이 엇갈렸다. 사마란치는 모든 유니폼의 경비는 IOC가 제공키로 한다고 발표해 놓고는 정작 공동 입장이 이루어진 후에는 모르는 척했다. 내가 왜 유니폼 비용을 주지 않느냐고 했더니 그때서야 얼마나 들었느냐고 해서 15만 불이라고 말하자 3만 불만 주겠다고 했다. 기가 막혀서 5만 불을 내라고 했더니 많다고 4만 불로 하자고 해서 할 수 없이 그냥 받아들였다.
이런 식으로 사마란치와 나는 겉으로는 가장 가까운 사이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여러 가지 문제로 빈번이 부딪히기 시작하였다. 이런 것들이 사마란치로 하여금 나보다는 자크 로게를 선택하게 한 결정적인 원인의 하나가 된 것 같다.
사마란치는 자기의 뜻에 이론을 제기하는 나보다는 같은 유럽인이면서 수렴첨정이 가능한 자크 로게 쪽으로 돌아섰다. 말끝마다 중립에 선다고 했지만 중립을 지키겠다는 약속은 이미 물 건너갔고 상대방 지지공작을 끊이지 않고 하였으며 더 나아가 사마란치는 노골적이면서 간교하게 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