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란치나 백인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할 일을 열심히 했고, 내 지지 세력들도 커다란 동요를 보이는 것 같지 않았다. 제112차 IOC 총회가 열리는 모스크바 현지의 분위기도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었다. 이대로만 간다고 하면 확률은 50 대 50이며 오히려 내가 더 유리하지 않겠느냐고 내외신 기자들이 조심스레 분석했다.
그런데 사마란치는 내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다. 나는 선거 직전에 있었던 정견 발표문에서 “IOC는 끊임없이 개혁해야 하고 지속적으로 현대화해야 한다. IOC 위원들이 올림픽 유치 후보도시를 방문하는 것을 규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올림픽을 치르는데 개최지 결정권을 갖고 있는 IOC 위원이 현장을 보지 않고 어떻게 결정할 수 있겠는가. 투명하게 하기 위해서는 이제 재정이 넉넉한 IOC가 모든 경비를 부담하고 그룹을 두세 개로 나누어 방문케 하면 된다. 그리고 IOC 위원이 아무리 명예직 무보수 자원봉사지만 최소한의 경비를 지원해야 된다. 매년 일정 수준의 경비를 지원해서 사무실 유지나 올림픽 운동 증진에 쓰도록 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거기에 “IOC는 올림피즘 확산에 전념해야지 쓸데없이 각종 분과위원회를 많이 만들어 낭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분과위원회 행사에 참여하느라고 연 200여 명의 위원이 이동하면서 쓰는 비용을 줄여 차라리 스포츠 발전에 써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덧붙였다. 사마란치는 숙박비로만 20만 불 이상을 쓰고, IOC 기념품 수집위원회 같은 별 의미도 없는 위원회를 구성해서 조직만 확대하는 것은 개혁에 역행한다는 것을 시사한 내용이었다.
IOC 위원장 선거 막바지에 이르러 사마란치의 방해는 심화되었다. 갑자기 예정에 없는 윤리위원회를 열어 나를 직간접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내가 IOC 위원장이 되면 IOC는 어렵다, 솔트레이크 사건으로 미국에도 못 간다는 악성루머가 사마란치와 로게 진영에서 흘러나왔다.
FBI의 조사를 받고 있는 사람이 사마란치 본인과 여러 IOC위원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루머가 퍼진다는 것이 아주 불쾌했다. 나는 솔트레이크와는 관계없이 부시 대통령 취임식에도 참석하고 미국 국회를 방문하여 상하원 외교위원회에서 남북문제도 설명하고 고위 인사들을 수시로 만나고 있었다.
음바예(Mbaye)가 주도하는 IOC 윤리위원회에서는 내가 IOC 위원들에게 사실은 액수는 말하지도 않은 연간 경비 5만 불을 지원한다는 것을 마치 뇌물을 주는 것처럼 보도자료(프레스 릴리스)를 배포했다. 연간 5만 불 경비를 주는 것은 IOC 위원들이 올림픽과 관련한 어떠한 향응도 받지 않고 떳떳하고 투명하게 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가 그렇게 말하다니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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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의 사마란치와 회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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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하기 전에 열린 IOC 윤리위원회에서는 인신공격 등 총공세를 펼쳤고 부하들을 동원해서 김운용을 반대해야 한다고 로비를 돌아다니면서 IOC 위원들을 설득하고 있었다. 윤리위원회는 투표 직전 조사결과를 발표한답시고 ‘혐의를 조사했지만 사실이 아니다’라고 발표했다. 피해는 이미 입은 뒤였다. 의혹에 지나지 않는 발표는 선거 후에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선거 전날 마리오 바스케즈 라냐(Mario Vasquez Rana)를 시켜 사퇴권고도 했었다.
결국 나는 사마란치와 자크 로게가 연합 전선을 편 선거전에 패했다.
7월 16일 열린 IOC 총회 마지막 날 최종 안건인 IOC 위원장 선거에서 1차 투표 때 디프란츠(미국)가 탈락하고, 2차 투표에서 자크 로게(벨기에)가 59표, 내가 23표, 파운드(캐나다) 22표, 슈미트(헝가리)가 6표를 얻어 과반수를 획득한 로게와 사마란치 진영의 승리로 돌아갔다. 하루 반 전 까지만 해도 내가 이길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그때까지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 사마란치의 입김이 너무 거셌다. 인사문제 투표인데도 전자투표였고 물론 정견 발표기회도 주지 않았다.
선거에 진 후 나보다도 일본 기자가 “이처럼 타락한 선거는 본적이 없다. 제소해야 하지 않겠냐”며 격앙된 어조로 억울해 했고, UPI 통신사와 영국의 인디펜던트지(誌) 기자마저 “UN이 감시했다면 재선거를 요청해야 할 정도로 엉터리 선거였다”고 말하면서 “김 위원장의 양팔, 양다리를 묶어 놓고 자기들은 마음 놓고 뛰어 다니면서 운동경기를 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고 평했다. 북한의 장 웅 위원도 하루 반 전 까지만 해도 될 것 같았는데 하루 반 사이에 표가 다 날아가더라고 했다.
사마란치는 IOC 집행위원들도 전혀 모르는 비밀 협약을 통해서 15년 동안 파운드에게 사업 활동의 대가로 400만 불이나 되는 거액을 지불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로게 신임위원장이 밝혔는데, 자신은 그렇게 해놓고 IOC 위원들에게 1년간의 경비로 5만 불을 주겠다는 공약이 뇌물을 주었다고 비난한 것은 지나친 처사였다.
모스크바에서는 딕 파운드도 기자들에게 IOC 위원의 연간 경비 5만 불을 주겠다는 것은 자원봉사 정신에 위배된다고 말하면서 나를 공격한 바 있다.
나는 IOC 윤리 규정을 준수하기 위해서 체육인이나 국민들이 원했던 후원회도 하지 않았고 선거 운동도 자제했다. 스포츠의 기본정신이 페어플레이다.
솔트레이크 사건 때 나는 주로 미국 언론들의 표적이 되어 공격을 받았으나 모스크바 IOC총회에서는 일제히 돌아서서 나를 지지하고 성원해 주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즈, USA 투데이, 뉴욕 타임즈 등의 미국 언론사들은 내 패배를 진심으로 아쉬워했으며 프랑스의 리퀴프지(L'equippe), AFP통신, 스위스 신문들도 선거 결과에 대해 유감을 표하면서 나를 위로했다. 미국올림픽위원회(USOC) 위원장인 볼드윈(Baldwin) 여사는 기자회견에서 공식적으로 내 지지발언을 하기까지 했다.
선거가 끝난 얼마 후 외무부 장관 공관에서 만찬이 있었는데 미 국무성 파웰(Powell) 장관을 비롯해 고위층 인사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이번만은 아시아에서 IOC 위원장이 나올 줄 알았는데 안됐다면서 미국은 표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내가 밝혔던 정견이나 개혁 방향에 대해서 그 뜻을 제대로 알았고 진정 올림픽과 IOC를 위하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이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올림픽은 너무 상업화 된 결과로 약물 복용, 뇌물 거래 등 문제가 많이 나오고 있다.
결과에 승복하는 것은 스포츠인의 마땅한 도리다. 그렇지만 IOC 전체를 혼탁하게 하고 IOC 위원들 간의 불협화음을 조장한 사람들이 건재해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내가 IOC 위원으로 있는 한 신임 자크 로게 위원장에 대해서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나를 따르던 IOC 위원들에게도 다시 IOC가 단합하여 인류 최대의 제전인 올림픽을 잘 치르고 올림피즘이 지구촌 전 가족에게 확산되기 위한 노력을 다할 것을 당부했다.
사마란치는 선거 직후 만나자고 여러 번 요청했으나 나는 전화도 안 받고 면회도 거절했다.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때 처음 재회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