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자를 격파하는 피아니스트 외교...

약 10여 년 전이었던가, ‘피아노’라고 하는 영화가 국내에 들어와 대히트를 한 적이 있다. 그 영화는 할리우드에서도 인기가 있어서 주연 여배우가 아카데미상을 받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정말로 아름다운 영화였다.

나는 시간에 쫓겨서 좀처럼 영화 감상, 음악 감상, 독서 등을 할 수 있는 여유가 별로 없다. 일상의 바쁨이 내게 휴식의 즐거움을 만끽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항상 분주하고 무언가 계획을 세워서 추진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언제나 시간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가 보고 싶어서 간신히 시간을 만들어 아내와 함께 보았다. 피아노를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는 여성과 원시림에서 야생 생활을 하고 있던 어떤 남자가 피아노를 통해서 서로 만나 결국 사랑으로 맺어진다고 하는 내용이었다. 특히 이 영화의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쉴 새 없이 계속된 풍부하고 은은한 피아노의 선율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국민학고 4학년 때 처음으로 피아노를 배웠다. 피아노가 너무 재미있었고 선율에 매료되어 중․고등학교, 대학 때에도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간직했었다. 물론 지금도 나의 손가락은 피아노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다.

어머님은 내가 피아노에 너무 집착하자, 당시 국내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의 한 사람인 이화여대의 신재덕 교수에게 나를 데리고 갔다. 정말로 내가 소질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교양 정도로 배우게 할 것인지를 어머니가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님의 심중에는 아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여 입신양명해 주기를 기대하셨는지도 모른다. 그 당시에는 아직도 봉건적인 사고방식이 지배적이었기에.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대성할 수 있는 재능이 있는 것인지….” 신재덕 선생님의 말에 어머니와 나는 실망 반 안심 반이 되었다. 사실 그 당시 나도 말로는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고 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어쩌나 하는 염려도 마음속에는 약간 남아 있었다.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은 계속해서 피아노만을 치게 될 것이고, 공부도, 운동도 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피아노 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이 정말로 좋았기 때문이다.

고교시절 나는 학교 축제 때에 피아노 독주를 했다. 주로 쇼팽의 ‘즉흥환상곡’과 베버의 ‘무도회의 권유’ 등을 연주했고 연희대학 1학년 때 대학음악회에서도 독주를 했다. 나의 피아노 연주를 본 사람들은 과찬을 하곤 했다. 그러나 사실 나는 피아노의 천재도 아니고 단순히 손가락이 부어오르고 코피를 흘릴 정도로 노력을 기울인 끝에 익힌 연주로 음악 천재들의 흉내를 내고 있었을 뿐이었다.

예술의 세계는 천부적인 소질을 요구한다. 그러나 노력도 하지 않고, 타고난 천재라느니, 세계적인 예술가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역사상 그 누구도 없었다. 나도 역시 전신이 땀으로 뒤범벅이 될 때까지 한때는 피아노를 연주하고 연습한 덕분에 쇼팽을 연주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배웠던 피아노는 외교관으로 근무한 먼 후일 나에게 커다란 힘이 되어 주었다. 나는 많은 외국인을 집으로 초대하여 식사를 함께 하곤 했다. 식사가 끝나면 분위기를 만들기 위하여 자주 피아노를 연주했다. 내가 즐겨 연주한 곡은 쇼팽과 모차르트곡이 많았다. 다행히 많은 사람들이 나의 연주를 기뻐하며 즐겁게 받아주었다.

외국인뿐만 아니고 대인 관계에서는 상대를 어느 정도의 격식으로 대접을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더구나 외교관급의 신분에 사람들을 대응할 때에는 특별히 신중해야만 한다. 외교를 위하여 말을 많이 하지 않고도 피아노를 통해서 순간적으로 그들과 친숙하게 될 수 있는 기술(무기)을 하나 갖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인연으로 그 당시 미국 엘파소(El Paso)의 방송국으로부터 초청되어 TV에서 피아노 연주를 한 적이 몇 번 있었다.

▲ 사마란치 위원장 서울 방문 때 피아노를 연주하는 필자

저녁 식사가 끝나고 나서 나는 그때마다 피아노만을 연주한 것이 아니다. 피아노 연주가 끝나고 나면 그 다음 순서가 또 있었다. 나의 피아노 실력에 대한 아낌없는 찬사가 끝나면, 나는 두꺼운 송판을 준비하여 그것을 마루 위에 쌓아놓고 주먹으로 격파 시범을 보여주었다. ‘얏’하는 기합 소리와 함께 두꺼운 판자가 쩍 하고 갈라지자 모두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지금까지 피아노를 연주하던 사람이 같은 손으로 단숨에 송판을 격파하는 묘기에 그들 모두가 신기한 표정들을 지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한국동란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도 약소국이어서 외교적으로도 극히 빈약한 상태였다. 그런 시대였기 때문에 외국인들도 대한민국과 한국인을 과소평가하고 있었으며, 심한 경우에는 미개인처럼 취급당하는 외교관까지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한국인을 결코 가볍게 보지 말라는 뜻을 포함하여 이런 행동으로 나타내고자 했다.

유감인 것은 그 당시 우리나라를 자랑하고 싶어도 우선 자랑할 만한 것들이 별로 생각나지 않았다. 그들이 우리나라에 대해서 아무런 지식이 없었기에 “이것이 우리들 것이다”라고 자랑한다고 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 뻔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때에 마침 많은 태권도 사범들이 청운의 꿈을 품고 세게 각지에 진출하여 한국 가라테(Korean Karate)라는 이름 아래 태권도를 가르치기 시작했기에 그나마 조금은 태권도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역사와 전통이 얼마나 뿌리가 깊고 빛나는 문화를 형성해 왔는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스스로 격파 시범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 이후에 그들은 나를 만만하게 보지 않게 되었고, 우리나라를 우습게 여기던 그들의 태도도 180도 달라졌다.

그러나 이것이 이번에는 파티를 하는 자리에 출석할 때마다 송판을 격파해 보라고 해오는 통에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한번은 원목으로 된 책상 뚜껑을 가져다 놓고는 격파해 보라고 했다. 나는 무척 난감해졌다. 수련을 계속해 오던 몸도 아니었으니 아무데서나 격파 시범을 보이는 것은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외국인들은 그저 재미있어하며 내 주위를 둘러싸고는 웃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날 테스트하려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설 내가 아니었다. 정신을 집중하여 주먹으로 책상 뚜껑을 내려치자 주먹에 큰 통증이 느껴졌다.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원목 책상 뚜껑은 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쳐주었다.

일본에 의한 식민지 지배라고 하는 억압 속에서 보낸 시대를 경험했고, 전후에는 또 다시 한국동란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당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도 외국인에게 멸시를 당하고 있어서 언제나 가슴이 아팠기 때문에 송판을 격파하는 시범을 보인 것은 그야말로 외국인의 콧대를 꺾는 게기가 되었으며 나 역시 호쾌한 기분이 들었다.

단지 내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격파 시범을 보여준 것은 항상 원만한 인간관계를 쌓을 목적뿐이었다. 무언가를 과시하기 위하여 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때로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실력을 똑바로 표시해 둘 필요가 있다는 점도 알았다. 상대방보다도 약하게 보인다든지 수준이 낮다고 평가되어서는 결코 큰일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보다 더 커다란 일을 하기 위하여 무엇이든지 다른 사람보다도 한 발 앞서 나아가야 하고, 한치 앞이라도 더 멀리 보고, 한 단계 더 나은 실력을 갖추기 위하여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항상 명심하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