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천에는 숙모가 살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도 같은 인민군의 점령 하에 있었다. 과천 우면산에 숨어 있었는데, 숙모가 가끔 몰래 주먹밥을 가져다주었다. 정해진 시간에 숙모가 오지 않으면 산기슭 밭에서 오이를 따서 먹거나 도토리를 먹기도 했지만 허기질 때가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군이 인천에 상륙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함포사격 소리가 들려 우면산 꼭대기에 올라가 보니 거대한 전함에서 대포가 불을 뿜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미군이 왔다는 것을 알았지만, 일주일이 지나도 미군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인민군들이 산속으로 도망을 쳐 올라왔다. 그러자 우리는 인민군을 피해 산 중턱으로 내려와 볏짚단 속에 숨어 있었다.
미군 정찰대와 탱크가 와서 산을 향해 포격을 가하자 인민군은 치열하게 대항하고 싸웠다. 미군 정찰대가 퇴각하고 잠시 잠잠하더니 이번에는 미국 공군 폭격기가 날아와 폭격을 해댔다. 볏짚단 속에 숨어 있다가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기에 사람들은 방공호 속에 숨었다.
산속에는 인민군이 숨어 있고 마을에는 미군이 들어왔지만, 우리는 중간에 끼어 있는 상태가 되어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숨을 죽이고 숨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 정적이 감돌았다.
나는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나 싶어 밖으로 나와 봤는데 운이 나쁘게 인민군 패잔병에게 잡히고 말았다. 인민군 병사들은 총을 들이대고 무엇 하는 놈인가 하고 물었다. 나는 근처에 사는 교원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들은 나를 어떻게 할까 잠시 주저하다가 퇴각을 서두른 탓인지, 나를 그냥 두고 사라졌다. 이렇게 하여 두 번째 죽을 뻔한 위기를 만났지만 무사히 넘겼다.
서울이 다시 한국군에 의하여 수복되자 나는 곧바로 입대를 했다. 조국이 청년들을 필요로 하여 부르고 있었기에, 여기에 응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 당시는 입대해서 싸우는 것 이외에는 별로 할 일도 없었고, 인생의 아무런 가치도 찾을 수가 없었다. 외교관이 되려고 한 꿈은 멀리 사라져 가고, 군인이 되는 길 이외에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전쟁은 끝이 났다. 그러나 나의 군인 생활은 얼마간 계속되었다. 19살에 중위가 되었고, 21살에는 대위, 23살에는 소령이 되었고, 29살에는 중령으로 예편을 하였다.
나는 군 생활 도중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1955년에는 텍사스에 있는 웨스턴대학에서 1년 반 정도 정치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1959년에 연희대학교(현 연세대학교)의 정치외교학과에 학사 편입하여, 1960년에 비로소 졸업을 했다. 그리고 바로 대학원에 들어갔으며 대학원생인 나는 당시 체신부 장관이었던 이응준 장군의 주례로 결혼을 했다.
내가 수년간 군인 생활을 했던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어쩌면 그 당시는 일반 사회보다도 군이 더 세계의 흐름을 따라잡는데 빠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있었기에 그랬는지 모르겠다.
각종 정보가 군으로부터 흘러나와 일반 시민들에게 알려졌다. 식민지로부터 해방 후, 한국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서 많은 것을 우리나라는 미국에 의존했다.
미국이란 즉 미군을 의미한 것이다. 미군정 하에서 결정된 것은 한국군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 전체로 확산되었다. 나는 연락장교로서 미군의 내부를 보다 잘 알게 되었으며, 전 세계를 손아귀에 넣고 있는 미국의 실태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가 있었다.
나는 미국에 유학할 기회를 얻었지만, 본격적인 유학이라기보다는 어려서부터 넓은 세계로 나가려는 꿈을 실현했다는 것에 더 큰 의미가 있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호랑이를 잡을 수가 없다’라는 속담이 있다. 그 속담이 뜻하는 것처럼 세계를 알기 위해서는 세계의 심장부인 미국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년 반이라는 짧은 유학기간 동안이었지만 내게는 너무나 귀중한 시간이었다. 미국의 대학생들과 자유롭고 개방적인 분위기 속에서 공부를 했고 토론을 했으며, 자기 생각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게 되었다.
내가 제대한 것은 1961년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였다. 4․19 민주혁명으로 세계가 한국에 관심을 갖고 있던 중에, 5․16 군사 쿠데타 이후 또 다시 실망을 하게 되었다.
군인은 결코 정치에 간섭하면 안 된다. 군대는 늘 국민의 편에 서야 하며, 국내외를 막론하고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는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생각을 4․19 때부터 품게 되었다. 당시 나는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절대적 권력자인 자유당 정권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허무한 순간을 눈으로 목격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