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있어서 아버지는 누렇게 빛이 바랜 한 장의 사진 속의 기억밖에 없다. 3살 박이 아들의 손을 잡고 똑바로 서 있던 아버님의 사진 속 모습이 내 기억에 있는 아버지의 전부다. 그 속에 아련히 친숙하게 느껴지던 몇 가지 장면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단 하루도 아버지의 존재를 잊어버린 적은 없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아버지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란 존재는 있을 수 없었을 것이기에.
나의 아버지 김도학은 대구에 있던 일본신문사 조선민보사(朝鮮民報社)에서 기자로 근무했는데 돌아가시기 직전에는 서무부장 겸 경리부장이라는 직책에 있었다. 아버지는 39살이 된 그해 겨울 어느 날, 갑자기 이 세상을 하직하셨다.
지독한 감기가 걸려서 몸이 많이 허약해진 상태에서 가족의 만류를 뿌리치고 출근을 한 아버지는 사원들에게 직접 급료를 건네주고 나서 결산 처리를 위해 혼자서 회사에 남았다고 한다. 허름한 목조 건물에 난방용 난로 하나가 있었던 곳이었다. 마침내 일을 끝냈을 때는 이미 지독한 고열 상태였으며, 한밤중에 인력거로 집에 귀가했을 때는 급성 폐렴으로 악화됐다고 한다.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운 아버지를 그날 밤 급히 경북도립병원에 입원을 시켰지만 그 다음날에 결국은 세상을 뜨시고 말았다. 기적의 묘약이라고 하던 페니실린이 사용되기 6개월 전, 당시 나는 겨우 6살이었다.
나는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 속에서 아버지를 자주 만난다. 아버지는 내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때부터 내 손을 잡고 여기저기 자주 다니셨다고 어머니가 말씀해 주셨다. 아버지 손에 이끌려 신문사에도 몇 번 갔었다. 아버지는 대구공설운동장에서 무슨 경기가 있으면 꼭 나를 데리고 가셨다. 저명한 예능인과 예술가가 연주하는 대구역 앞의 공회당에도 데려 갔으며, 음악회에도 자주 갔단다.
그뿐 아니라 경상북도 지사가 주최하는 파티에도 어린 나를 데리고 가셨고, 나는 덕분에 당시 고위층 인사들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금으로 수를 놓은 도지사의 예복을 직접 가까이서 보았을 때는 내 자신도 앞으로 도지사가 된다면 저와 같은 모습의 훌륭한 예복을 입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군인들의 사벨 칼을 찬 모습에 완전히 넋을 잃기도 하였다. 아주 짧은 몇 년간 나는 아버지를 따라서, 현재는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일상적으로는 겪기 어려운 세계를 간접적으로 접했다.
아버지는 글 쓰는 것을 좋아하셨고, 몇 편인가의 글을 남기셨는데, 특히 ⌜금강산 유람기⌟ 는 유명 작가 작품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경희대 국문과 교수들이 평했다. 아버지가 남기신 이 기행문은 금강산 외금강과 내금강 구석구석을 걸어서 느낀 감상과 풍경을 담았는데 당신의 나라와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유품 중에는 1929년 당시의 신문의 표제와 각종 성냥갑들이 있었다. 성냥갑 라벨을 수집한 스크랩에는 한국, 일본, 만주, 하와이, 시베리아, 중국 등 각국의 상표가 붙여져 있었다.
일제 침략 시대였기에 모든 물건들이 일본풍으로 물들여져 있었지만, 한 가운데 4페이지 정도만은 특별히 호랑이와 태극기가 그려진 조선제 성냥갑 라벨 등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것을 볼 때마다 나는 일본인 학교에 다니시고, 일본 신문사에서 일을 하시던 가운데에서도 항상 독립을 기원하는 애국심을 숨기고 계셨던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으로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눈물과 함께 감정이 복받쳐 오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아주 어린 시기에 나는 아버지를 여의었기에 가물가물하지만 내 기억속의 아버지는 항상 자상하시면서 다른 사람들보다 몇 갑절 더 위엄에 가득 차 있었다.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아버지는 젊어서 신문사 간부, 상공회의소 위원 및 대구의학 전문학교 설립위원회 간사장 등 대구 발전에 관계되는 여러 가지 일을 맡아 활동하셨다. 그때부터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관심을 보이셨던 것 같고 실력도 겸비한 분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특히 음악과 스포츠 분야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애정을 갖고 계셨던 것 같다. 오르간이나 바이올린 연주도 좋아하시고 서울에서 저명한 사람의 연주회가 열리면 그걸 보기 위해 서울까지 상경할 정도였다. 스포츠에 대한 관심도 많으셔서 테니스를 좋아하셨고, 때로는 야구 시합을 보러 가시기도 하셨다. 생활은 여유가 있어 어머님도 아버지의 취미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셨다 한다.
세 살 때의 기억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담배과자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 속에는 내가 좋아하는 군함 그림이 들어 있어서 나는 아버지에게 자주 선물로 사달라고 졸랐다. 연회가 끝나고 귀가가 늦으시면 나는 잠들어 버리고 난 후였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 내 가슴의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그 담배과자가 들어있었다. 아버지는 나와의 작은 약속을 꼭 지켜주시곤 하였다. 그래서 나도 우리 아이들과의 약속은 꼭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나와의 약속을 두 번 지키시지 않은 적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바라던 장난감 기관총을 내가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사주시지 않은 것과, 또 하나는 내가 커서 성장할 때까지 함께 살자고 했던 약속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아버지는 너무도 갑자기 세상을 하직하셨다. 내 존재의 원점은 아버지였다. 내 이름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운용이라고 하는 것은 ‘용과 같이 구름을 타고 지구를 날아다닌다’라고 하는 뜻일 것이다.
나는 오랜 동안 일 년에 절반 이상을 외국에서 보냈다. 이름 그대로 구름을 타고 오르는 용은 되지 못했지만 비행기를 타고 구름 속을 날고 있으니 아버지의 바람은 어느 정도 맞았다고 볼 수 있다. 한 해에 지구를 20바퀴 이상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이미 이 세상 분이 아닌 아버지는 누렇게 빛이 바래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밴 사진과 함께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하지만 내게 아버지는 지금도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