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을 인류 최대 제전으로 이끈 사마란치-1 (73회)
  제12장 잊을 수 없는 사람들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 위원장은 20년을 넘게 함께 지내온 지인이다. 그는 나보다 나이도 연상이고, 서로 '형제(brother)'라고 부르며 지내는 사이다. 사마란치는 내가 출마했던 IOC 위원장 선거에 있어서 반대편에 서서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지만 그가 올림픽 운동에 기여한 공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내가 그를 처음으로 만났던 것은 1975년 로마 ANOC(국가올림픽위원회총연합회) 총회였다. 첫 대면부터 위압감이 있었지만, 동시에 이상한 친밀감을 주는 기묘한 인연의 인물이었다. 그 다음해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GAISF(국제경기연맹총연합회) 총회에서는 당시 IOC 부위원장인 그가 자신 명의로 된 꽃다발을 내 방에 보내왔다.

서로 친밀하게 접할 수 있게 된 결정적인 기회는 역시 서울 올림픽 유치 활동을 전개할 때부터다. 서울 올림픽은 역사상 가장 많은 난제들을 안고서 열린 대회였지만 올림픽 사상 가장 훌륭하게 거행된 대회였다. 특히 서울 올림픽 경기 스케줄 문제와 TV 방영권 문제가 난항을 보였을 때, 그것들을 함께 해결하면서 우리 두 사람은 급속히 가까워졌다.

당시 국제 스포츠계에서는 IOC의 사마란치 위원장과 국제스포츠연맹의 집합체인 GAISF의 토마스 케라 회장이 치열한 주도권 쟁탈전을 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 하에서 나는 차기 GAISF 회장 선거에 입후보하였는데 현역 케라 회장이 후보 등록을 하지 않아 만장일치로 내가 회장이 되었다.

GAISF 회장에 선출된 직후 내가 선택한 것은 IOC와의 대립이 아니고 평화 공존의 노선이었다. 세계 평화에 공헌하는 것이 올림픽 정신의 기초라는 나의 생각과 사마란치의 생각은 일치했다. 그는 국제 스포츠계가 묘한 감정적 대립과 세력 확장의 의식으로 대립하고 있던 상태를 타파해야만 한다고 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어서 IOC와 GAISF의 상호 협력을 증진해 나갔다.

사마란치는 세계 스포츠계를 움직이며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진취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세계의 미래를 정확히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자기의 일에 대해서 확고하고 명확한 신념을 갖고 있으며, 일에 대해서는 완벽을 추구하는 인간이다.

그는 외견상 조금 냉혹하게 보이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온화하며, 정이 많은 사람이다. 사마란치는 항상 함께 일하는 동료들을 칭찬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의 명성을 위해서 혼자서 화려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을 가장 싫어한다. 오늘날 올림픽이 평화시의 인류 최대의 종합제전으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데에는 사마란치 전위원장의 힘이 크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 1982년 4월 8일, 국기원을 방문한 사마란치

사마란치는 주 소련 대사를 마치고 1980년 모스크바 IOC 총회에서 IOC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는 NOC위원장, 선수단장, 체육장관, 카탈루나(Cataluna) 자치령 지사, 모스크바 대사, IOC 부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경륜이 풍부했다. 세계 스포츠의 최고 기구를 이끄는 리더가 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올림픽 운동과 조직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빈사 상태에 빠져 있었다.

1896년 쿠베르탱 백작이 제창한 근대 올림픽은 그 이후 1980년 21회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미국이 보이콧을 하기까지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어 왔었다. 초창기에는 만국박람회가 열릴 때마다 장식용으로 올림픽 대회를 개최할 만큼 아주 초라한 상태였다. 정치적 색채가 농후한 대회였던 1936년 히틀러의 나치 정권 하에서 열린 11회 베를린 올림픽이 비교적 국제 종합 경기 대회로서 그 위용을 과시한 정도였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2번 중단 상태였던 올림픽은 1948년 런던 올림픽부터 재개되었는데, IOC는 그 이후에도 인종 차별, 정치 문제, 재정 문제 등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서는 그와 같은 갈등이 한꺼번에 분출되었다. 종국에는 IOC 내부에서조차 올림픽의 존폐 여부를 거론할 정도로 위기 상황에 빠져들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은 재정 적자 끝에 퀘백 주(州)의 재정난을 초래했고,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반대하는 미국 카터(Carter) 대통령이 주도한 서방 측 국가들에 의한 보이콧으로 반쪽짜리 대회로 전락하고 말았다. 평화와 화합을 구현한다고 하던 올림픽의 이념은 퇴색하고 약화되었다.

이러한 위기 상황 하에서 IOC 위원장이 된 사마란치는 리더십을 발휘해 올림픽의 영광을 되찾고자 했다. 사마란치 IOC 위원장은 올림픽 이념을 존중하고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올림픽 이념은 청소년에게 밝고 활기찬 미래를 열어 주는 교육적 가치와 인류를 더 잘 살고 풍요롭게 하며 보다 나은 사회를 연다는 데 있다.

사마란치의 장점은 현실을 누구보다도 더 확실히 파악하고 세계의 조류를 먼저 읽는 데 있다. 사마란치 위원장은 IOC 내부에 2가지 노선, 즉 에버리 브란테지가 강하게 고수하여 온 순수 아마추어리즘과 킬라닌 위원장이 시도했던 아마추어와 프로의 구별 철폐라고 하는 두 가지 노선 중 아마추어리즘에는 위배되는 올림픽 상업주의를 선택했다. 그는 올림픽에 수익 사업을 도입했다. 많은 사람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그는 자기의 결심을 굽히지 않고 자신의 결단을 밀어붙였다.

1984년 LA 올림픽이 사상 처음으로 흑자를 낸 올림픽으로서 기록된 덕분에 세계 각국이 올림픽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올림픽의 수익금은 올림픽 진흥운동에 사용되었다. 국제 경기연맹과 각국 올림픽위원회 선수 육성 기금으로 지원하는 등 올림픽 이념을 넓히는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사마란치는 실사구시의 인물이다. '돈이 없다면 올림픽도 할 수 없다. 문제는 벌어들인 돈을 다시 스포츠를 위해서 사용한다면 좋은 일이다'라는 것이 사마란치의 생각이었다. 올림픽 유치국의 경제 활성화에 도움을 주고, 올림픽에서 얻은 수익금을 올림픽 운동을 보급하고 확산하는 데 활용함으로써 올림픽을 범세계적인 제전(Festival)으로 발전시켰으며,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지만 상당한 영향을 주는 가장 전진적인 사회운동으로 끌어올렸다. 올림픽의 대중화와 세계화라는 IOC 100년간의 숙제가 사마란치에 의해서 실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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