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자녀는 여행을 시켜라’라는 속담이 있다. 나는 1남 2녀의 아버지다. 내 아이들은 모두가 외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내가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외교관 시절에 아이들이 구미(歐美)에서 태어난 영향이었을까? 아이들은 외국에서 독립된 생활을 잘 꾸려나가고 있다.
장녀 혜원이는 미국에서 유치원을 다녀서 그런지 내가 외교관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 한국의 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다시 자신의 뜻으로 미국 보스턴에 단독으로 건너가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도 다녔던 윌즈리 칼리지에 입학하고 미시간 법대를 졸업했다. 이후 변호사 자격을 획득해 뉴욕과 LA에 있는 법률회사에서 근무했고, 지금은 영국 런던에서 금융 전문 변호사로서 활약하고 있다.
장남 정훈이도 나의 출신교인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클라크대학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해 한때 미국 NBC 방송사에 들어가 재정관계 부서에서 근무했다. 현재는 독립을 해서 컨설턴트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장남의 처(며느리)도 이화여자대학에서 음악(바이올린)을 전공했다. 현재는 100명의 교수진과 함께 1,000명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음악대학을 운영 설립하고 있다.
한 집안의 가장은 인간 사회의 최소 단위다. 가정을 지탱하는 토대는 부모와 자녀 사이의 애정과 신뢰다. 부모가 자녀들을 믿어 주고 자녀도 부모의 생각을 존중하는 것이 상호 신뢰로 연결된다. 우리 아이들은 자기들의 장래를 자기들 판단으로 선택했다.
나는 한때 정말로 피아니스트가 되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외교관으로서 국제법학자의 길을 가려고 한 적도 있었다. 6.25 사변으로 일선근무를 하느라 어느 길도 나는 가지 못했는데 나의 분신들이 나를 대신해서 나의 길을 걸어가 주었다고 생각한다.
둘째 딸이고 막내인 혜정이는 내가 뉴욕 UN 대표부에 근무하던 시절에 태어났다. 그래서 그런지 보통 아이들보다도 독립심이 왕성했다. 외교관 생활을 하는 동안은 부임처가 갑자기 바뀌는 경우가 많이 있어 거주지를 옮기는 경우가 많아 아이들이 좋아하는 피아노를 사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새 부임지에서 그때마다 임대업자를 찾아 피아노를 빌렸다.
그러나 혜정이가 태어나자 우리 부부는 큰맘 먹고 그랜드피아노를 구입했다. 우리는 막내의 탄생을 기념한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샀는데 이 그랜드피아노가 혜정이에게는 장래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막내는 어려서부터 섬세한 음감을 가졌으며, 4살 때부터 본격적인 피아노를 시작해 초등학교 때는 서울시향의 오디션에도 합격했고, 이화경향 콩쿠르와 홍익대학교 음악 콩쿠르에서도 우승을 할 정도로 실력을 향상시켰다.
혜정이는 자발적으로 피아노 연습을 했고, 우리 부부는 한 번도 그녀에게 연습을 강요한 적이 없었다. 친척이나 친구들이 방문하여 그녀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나서는 절찬해 주었지만 우리 부부는 그때마다 그들에게 “너무 많은 칭찬을 하지 말라”고 말 할 정도였다. 어려서부터 그녀가 혹시 오만해지거나 우월감을 갖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부모가 애지중지하다가 엉거주춤한 생활을 보내고 비뚤어진 성격을 갖는 그런 애들이 많았기에 우리 부부는 일체 피아노 연습에 관해서는 그 아이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예술 분야에서는 유명한 예원중학교 3학년이 되자 혜정이는 미국 뉴욕에 있는 줄리어드 음악학교에 유학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곳에 유학을 한 혜정이는 재학중 여름방학이 되면, 영국으로 건너가 마리아 쿠르시오 선생 슬하에서 사사를 받았고, 러시아 모스크바 음악대학에서도 배웠다. 그 후 독일의 쾰른콩쿠르를 비롯해 미국, 이탈리아, 그리스 등 많은 음악 콩쿠르에서 우승을 했고 세계 각국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88년 서울 올림픽 때는 문화행사 프로그램 중의 하나인 서울 국제음악제에서 모스크바 필하모닉과 함께 공연했고,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도 독주회를 했다. 광복 50주년 기념음악회에서도 자랑스러운 해외 한국피아니스트로 초청되었다.
내 친구들은 가끔 나에게 아버지인 내가 스포츠를 통해서 한국 스포츠의 역량을 세계에 과시하는가 하면, 딸은 음악을 통해서 한국인이 갖는 예술적 재능을 세계인들에게 알려주는 예술외교관 역할을 활발히 하고 있다고 말들을 하곤 한다. 사마란치 IOC위원장 내외도 가장 큰 후원자였다.
아버지인 나도 조금은 이런 딸을 자랑하고 싶은 때가 있다. 역시 부모라는 입장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러나 그 반면 국제무대에서도 질투가 빠질 수 없어 비방과 중상모략을 받는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런 일들로 인하여 부모로서 혜정에게 미안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