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돌아가면 나는 과연 몇 점짜리 남편이고 아버지일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문해 보지만 이렇다 할 만한 답은 잘 나오지 않는다. 내 자신을 놓고 본다면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집을 비우는 시간이 다른 가정의 가장들보다도 훨씬 많았고 길었기 때문이다.
친척의 소개로 지금 아내 박동숙을 만나서 아들 하나와 두 딸을 얻었다. 장인인 박정수 씨는 울산 읍장과 판사, 부산 변호사협회의 회장을 역임하신 분이다. 장모인 최정선 씨는 5․10 선거에 출마한 분이었다. 우리 부부는 두 사람 다 유복한 가정환경 덕분에 결혼 당시부터 경제적인 걱정을 한 기억이 없다.
아내는 처음에 내가 키가 작다는 이유로 별로 탐탁해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내의 이종사촌 언니의 소개로 처음 처가댁이 될 집을 방문한 그 날, 나는 좀처럼 입지 않던 양복을 꺼내 입었다. 어머님도 동행하기로 하셨다. 어머니는 보자기 꾸러미를 준비했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어 품에 안고 있었다.
미래의 장인 장모를 첫 대면하는 날, 쫙 빼입은 양복에 보자기를 안고 있던 나의 모습이 얼마나 어색했을까? 그러나 그러한 내 모습 덕분에 나는 지금의 아내와 결혼할 수 있었으니 인생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어머니가 주신 고풍스런 보자기를 품에 안고 장인 집 문을 들어가니 사람들이 우리의 도착을 알렸다. 2층 서재의 창이 열리고 누군가가 말없이 고개를 내밀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이유도 없이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나를 내려다보면서 관찰하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미래의 장인 되실 분이었다.
장인은 어머니가 주신 보자기를 가슴에 안고 장인 장모가 될 집을 방문할 정도라면 효자이고 성격도 좋을 것이라고 칭찬을 계속해 주시며 나를 사윗감으로 인정하셨고, 우리 결혼에 적극적으로 응원을 해주셨다.
우리는 1958년 4월 20일 서울 외교회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아내는 이화여자대학 피아노학과를 막 졸업했으며, 부산에 있는 기독교 방송국에 피아노 연주자로 근무 중이었다. 아내는 김성복 선생님의 제자였다. 내가 음악을 좋아했기 때문에 아내도 음악을 전공한 여성을 고른 것 같다. 아내는 지금까지 50년 이상을 함께 하면서 내 곁을 지켜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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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자 결혼식 때, 이응준 체신장관, 장도영 참모차장, 임부택 장군, 박창원 장군, Garison 장군 등이 참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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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바쁜 남편을 얻어서 단 하루도 편히 쉬지 못하는 여성’
‘해외여행 횟수는 많지만, 변변한 관광 한 번 해 본 적 없는 여성’
한국의 매스컴은 내 아내의 이미지를 이렇게 갖고 있는 것 같다.
15평의 작은 집에서 살고 있던 시절, 나는 모교인 경동중학교의 야구부원들을 집으로 데려와 접대했다. 아내는 작은 집에 살고 있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느냐며 펄쩍 뛰었지만 나는 전혀 관여치 않았다. 나는 나 자신만 생각했던 것 같다. 훗날 내 생각이 짧았던 것을 지금도 아내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아내는 가능한 한 이해하려고 노력했으며 헌신적으로 내조해 주었다.
그런데 이런 나를 아내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마음에 걸리던 차에 마침 아내가 어느 잡지에 발표한 글을 여기에 소개해 보기로 한다.
“남편은 자상하고 근면한 사람이다. 꿈이 굉장히 많고, 허세나 사소한 욕심이 없다. 나쁜 일은 절대 하지 않으며, 지금까지 프라이드 하나로 살아온 사람이다. 손금을 보면 횡으로 선이 길게 그려져 있는데 이와 같은 손금은 거액을 모을 수는 없지만 만지는 것은 가능하다고 한다. IOC 자금원인 TV분과 위원장으로서 한 번 올림픽이 열리면 수십억 달러 단위의 금전을 만지므로 어느 정도는 맞는 것 같다.
남편은 병원에 가서도 아프다고 하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기에 의사들은 곤란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신음이나 아픈 소리를 내는 것을 싫어하며, 항상 강하게 보이고 낙천적인 사람이다. 잠자리에 들면 바로 잠드는 타입이다. 세세한 것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큰일들을 처리하는 것들을 보면서 강심장을 갖고 있는 분이라고 여겨진다. 생애 단 한 번도 쉬는 것을 모르고 살아온 사람이다. 단지 비행기 안에서 쉬는 것이 자신이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장소라고 하니 안타까울 뿐이다.”
회상해 보면 정말로 바쁘게 살아온 것 같다. 일 년 중에 절반을 해외 출장 등으로 보내곤 했다. 우리 부부는 시간 여유가 없어 새 집이 마련되었는데 이사를 하지 못하고 수년간 비워 둔 적이 있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아내는 3명의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웠고, 아무런 불평도 한 적이 없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1986년 10월이었다. 태권도협회장은 명예직이라 취임 후 그때까지 나는 월급 한 번을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올림픽조직위원회 수석부위원장이란 직함으로 장관급의 급료가 들어왔던 것이다. 거국적인 대사인 서울올림픽은 나에게 장관 차량번호 1036과 장관 월급을 지급했다. 10년 만에 받은 월급을 아내에게 전하니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월급인데.”
“당신이 월급을 받는다는 것입니까? 어디에서 나왔는데요?”
“올림픽조직위원회로부터 나온 월급인데.”
“예에?”
“올림픽 유치로 고생을 했다는 의미로 특별히 나온 것이요.”
“자 그러면 월급이 아니고 특별 보너스군요.”
“그렇게 되는 것인가? 하하하”
“앞으로 계속 나오는 것입니까?”
“글쎄 나도 잘 알 수는 없는데?”
“아무튼 10년 만에 월급을 받아 보니까 역시 좋은데요. 가계에도 커다란 도움이 될 것 같군요. 소중하게 쓸게요.”
아내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10년씩이나 한 번도 월급을 가져다주지 않는 남편에게 잔소리 한 번 하지 않고, 자신을 죽이면서까지도 묵묵히 생계를 꾸려온 아내. 재산이 어느 정도 있어 경제적으로 궁핍한 적은 없었다고는 하지만, 내심은 그렇게 온화하고 평안하지만은 않았으리라. 나는 그런 아내에게 단지 감사할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