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운의 중고등학교 시절 (66회)

일본 학생들과 섞여서 앵정(사쿠라이)소학교를 졸업한 나는 욱구중학교(旭丘, 아사히가오카: 현재 경동중학교)에 진학했다. 당초 선생님들의 권유로 경성사범학교 진학도 고려했었다. 학비가 전액 면제되고, 당시에는 가장 우수한 학생들이 모이는 학교였기 때문에 선생님들은 내가 공부를 별로 하지 않아도 실력이 있으니까 하면서 그 학교를 적극 권유했다.

그러나 그 학교는 국비로 공부를 시켜 주기 때문에 졸업 후에는 의무적으로 소학교에서 2년간 근무를 해야만 하는 규정이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와 친척들은 나를 한국인이 다니는 중학교에 보내고 싶어 하셨다.

당시 명문이라고 하는 경기중학교나 경복중학교에 들어가려고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일본인이 다닌 소학교를 졸업한 학생이 한국인만 받아들이는 경기중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일본인이 다니는 경성과 용산중학교에는 가고 싶지가 않았기에 일본인과 한국인이 반반씩 다니는 욱구중학교를 선택했다.

당시의 중학교는 공립이 사립보다도 우수했다. 한국인 학생 중에 겨우 500명 정도가 공립학교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경기중학교 200명, 경복중학교 200명, 그리고 욱구중학고 100명 정도가 전부였다.

1943년 중학교에 들어갔다. 나는 소학교 시절부터 씨름(스모)이 특기여서 언제나 일본인 학생들을 들어 메쳤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일본인에게는 공부뿐만이 아니고 무엇으로도 지고 싶지가 않다고 생각을 했다.

스포츠로 복싱, 유도, 스케이트, 육상, 공수도 등 여러 가지 종목들을 배웠고, 피아노도 열심히 연습했다. 지금 시대였다면 어머니가 공부에만 전념하라고 말씀하셨을 수도 있겠지만 당시에는 모든 면에서 일본인 학생에게 뒤지지 않는 것을 보고 어머니도 자부심을 가지신 것 같았다.

▲ 욱구중학교 1학년 때

한국이 해방되기 전에 일본은 태평양전쟁에 마지막으로 총력을 기울였다. 여름에 들어서자 학도동원령이라는 명목으로 공부는 뒤로 하고 전 학생이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다. 그 중에는 소년 항공병이나 해군 비행사로서 전투병에 지원하거나, 선발되는 일본인 학생들도 있어 서울역 광장에서는 매주 송별회가 벌어졌었다. 당시에는 훌륭한 송별회였다고 생각했었지만 나중에야 그것이 어린 학생들을 전쟁터로 이끌어 전사를 각오케 하는 의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선 학생들도 많은 학생들이 징병되었는데, 나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군 동원에서 제외됐다. 그러나 비행기 연료로 사용하기 위하여 송진을 채취하기도 했고, 일본군이 탄약고를 만드는 작업에 동원되기도 했다. 1945년 8월 15일, 나는 학도 동원으로 서울 근교 안양에서 탄약고를 만드는 작업에 동원되어 있었는데 조선 반도가 일본군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해방은 사춘기 때와 같이 가슴이 두근거리는 감격을 주었고, 일본 제국주의 군사 교육에 의해 희생을 강요당한 그 당시, 전쟁의 종결과 한반도의 해방은 식민지 지배에 의해 말살되었던 꿈과 희망에 밝은 빛을 점화시켜 주었다. 나도 태극기를 흔들면서 우리 민족과 함께 행복한 환희 속에서 웅비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조국이 나에게 준 의미가 무엇이며, 내가 조국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나는 경동고등학교에 진학을 하면서 그 꿈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나의 학교 성적은 항상 상위에 있었지만, 유감스럽게도 1~2등을 다툴 정도의 실력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단지 영어에서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었다. 특히 중학생이 되면서 나는 영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하였다. 영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었고, 피부색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외국인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상당히 자랑스러웠고, 즐겁다고 생각했다.

해방 후 일본군이 사라지고, 대신 미군이 들어왔다. 당시 미군은 군부대뿐만이 아니고 대학에도 상주하면서 경계 근무에 나서고 있었다. 보초 근무에 나선 미군 병사들은 한국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좋아했고, 가능하면 친절한 태도로 우리를 대했다.

나는 당시 동숭동에 있던 서울대학교에 자주 들러서 미군들과 대화를 나눴다. 우리 집에서 기억한 말들을 한 마디 두 마디 한 것뿐이지만 미군들은 어린 소년이 영어로 말하는 것을 보고 항상 재미있어하며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내가 배운 영어란 “What's your name?"과 "What time is it now?” “I am afraid I must go.” 정도로 실생활에서는 거의 사용하지도 않는 그냥 사전에 나와 있던 영문이 전부였다.

나는 밤늦은 시간대에도 미군들을 만나러 가서 함께 놀았다. 모닥불을 쪼이면서 미군들의 이야기를 듣곤 했다. 나는 언제나 그들의 대화를 듣는 입장이었고, 처음에는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지만 자주 듣고 있으니까 조금씩 귀가 열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덕분에 나는 영어 시간에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해 선생님들의 총애를 받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