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내게 항상 최고의 물건을 주시려고 고심하셨다. 대구의 덕산 소학교에 3학년까지 다닌 나는 집이 서울 명륜동으로 이사를 해서 전학을 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특히 교육에 관해서는 각별하시어 시골에서 자라 겨우 서울에 도착한 나를 일본인이 다니는 앵정(桜井:사쿠라이)소학교에 입학시켰다. 그 학교에서는 내가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일본인 애들보다 체격으로 압도되어 위축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셨는지 버섯이나 인삼 등을 다려서 강제로 먹여 주셨다. 당시 나는 쓰디쓴 한약을 먹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어느 날 도저히 먹기가 괴로워 벽에다 약이 든 사발을 던져 버리고 말았다. 그 소리에 놀란 어머니는 나에게 격노하셨다.
“우리 집은 그래도 남들보다 살기가 괜찮은 편이어서 밥 먹는 걱정은 하지 않고 살지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배를 굶주리고 살고 있으며 내일 아침 끼니를 걱정하면서 생활하고 있는 시대란다. 허약한 몸에 잘 듣는다 하여 좋은 약을 사왔는데 아무리 먹기가 싫다고 그것을 던져 버리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보면 창피한 일이요 벌 받을 일이다.”
어머니는 그 한약은 아주 귀한 것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것을 버렸다는 것에 무척 서운해 하시며, 불편함이 없이 성장한 자식의 버릇없음을 훈계하시고 싶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런대로 풍족하게 생활하고 있던 것에 감사의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며 나의 종아리를 회초리로 때리셨다. 나는 그날 종아리가 부어오르도록 맞았다.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어머니의 사랑의 회초리였다.
평상시 어머니는 스스로 모범을 보이시면서 자식들을 가르치시곤 하셨다. 그 회초리 사건 이후 나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거역하는 것은 두 번 다시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당시 우리 집은 지주였다. 안동에 광산도 소유하고 있었고, 수성, 칠곡, 지천, 영천, 의성 등에도 토지를 갖고 있었다. 서울에는 집이 몇 채 있었고, 대구에도 몇 군데에 분산해서 집과 재산이 있던 비교적 여유가 있는 생활을 했다. 나는 이와 같은 환경 속에서 어머니의 자상스런 보살핌으로 무럭무럭 자랐지만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혼자서 집안일을 도맡아 관리하셨으니 상당히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던 것 같다.
재산을 노리고 접근해 오는 친척들도 많았고, 사촌에게 재산을 맡겼다가 엄청난 손실을 입기도 하셨다. 물론 나는 그러한 사정을 조금도 몰랐었으며, 그 당시에는 여성의 권리가 전혀 인정되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 혼자서 가산을 지켜 오셨던 일들이 상당히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모든 곡물들이 공출당하여 생활하기가 쉽지 않았고, 해방 이후에는 토지개혁으로 토지를 소작인들에게 나누어 주어야만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가 서울로 이사를 하신 것은 자식들을 서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성균관대학이 있는 명륜동으로 이사를 했으며, 그때 당시로는 일본인들만 다니는 소학교에 나를 전학시켰다. 당시 가회동은 서울 부자들이 혜화동과 명륜동에는 지방의 부자들이 살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던 그런 시절이었다.
일본인 학교에서의 공부는 대단히 엄하였다. 메이지유신으로 인하여 일찍부터 근대화를 이룩한 그들은 서구식 근대 교육을 기반으로 가르쳤다. 공부도 뒤처지지 않을뿐더러 운동도 소홀히 하지 않은 나는 어려서부터 운동과는 친하게 지내왔다.
4학년 때에는 학년에서 두 사람씩 대표로 출전하는 전국 릴레이선수권에 대표로 선발될 정도였으며, 교내 스모대회 뿐만 아니라 5~6학년 때에는 학년 릴레이 선수로도 나갔다.
전쟁 중이었으나 한 달에 한 번씩은 학교에서 교외로 소풍을 갔다. 당시 소풍은 어떠한 악조건이 닥쳐도 인간은 인간답게 성장해야 한다는 서구식 근대 교육의 실천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담임선생님의 인솔 하에 영화 감상을 한 기억도 선명하다. 소풍과 영화 감상은 학생들의 시야를 넓혀 주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높은 곳을 나는 갈매기가 멀리 보듯이 견문을 넓히는 데는 보다 효과적인 공부였던 것 같다.
일본인 학교에 다니는 조선인이 공부는 물론 운동도 잘 한다고 일본인 학생들 사이에서 놀림감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우리 집에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진귀한 서적들이 많이 있었다. 아버지가 모아 두신 장서들이었지만 대부분은 일본어였다. 그 중에는 뤼팽 전집과 같은 흥미진진한 책들도 있어서 일본인 학생들에게 이런 책들을 빌려 주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등교해서 보니 지금까지 빌려 준 책들이 교실 책상 위에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책을 빌려 간 일본인 학생들이 “재미있었어. 고마워”하고 말하기에 나는 정말로 모두가 같은 날 책을 돌려 주나보다 하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나를 놀려 주려고 꾸민 계략이었다. 책들은 가방에 다 들어가지 않았고, 책상 위에도 밑에도 온통 책들로 가득했다.
바로 그때 담임선생님이 아침 조례를 하기 위하여 교실로 들어오셨다. 아침 조례가 끝나자 선생님은 내게로 다가와 무슨 일이냐고 물으셨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고 안절부절하는 것을 보고 한 일본인 학생이 입을 열었다.
“선생님! 김 군은 항상 학교에서 이런 탐정 소설들만 읽는답니다. 모두에게 빌려 준다고 하면서 공부를 방해하고 있답니다.”
나는 너무 놀라고 기가 막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변명을 하고 싶어도 그들이 전부 일본인들이었기에 나는 하지 않았다.
하늘의 도움일까. 일본인 선생님은 “이런 책들은 앞으로 집에서 읽도록.”하라고 말씀하시고 그냥 교실을 나가 버리셨다.
그 이후에도 나를 괴롭히고 놀리는 나쁜 일본인 학생들이 ‘조선인’이라면서 조롱을 하여 길바닥에서 싸움을 하기도 하였다. 나도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몇 번이고 했다. 그렇지만 “언젠가 독립하는 날이 오면 일본인은 전부 다 도망갈 것이니 그때까지 참아라”라고 하며 어른들은 나를 격려해 주셨다.
일본인 학생들의 놀림과 따돌림이 있으면 있을수록 나는 절대로 질 수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아마 어려서의 이런 일들이 훗날 일본에 대한 라이벌 의식으로 남게 되어 1981년 올림픽 유치를 위하여 일본과 경쟁할 때와 1992년 IOC 부위원장 선거에서 이가야 씨를 누르고 당선될 때까지 나의 마음 한구석에 계속 남아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