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88 양 대회는 한국스포츠의 국제화의 완성이 아니고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우리나라가 ’88서울 올림픽을 유치한 것에 대해 언론은 바덴바덴의 기적이라고 불렀다. 기적이란 표현을 당연하게 여겼던 것은 그만큼 우리나라 스포츠 외교가 취약했으며 무에서 유를 창조했기 때문이었다.
전후세대는 다 알겠지만 우리나라의 위상은 60년대 아시아에서 두 번째, 세 번째로 못사는 나라 중 하나였고 70년대 초반만 해도 북한보다 수교국가가 적을 정도로 힘이 없는 나라였다. 어디에 붙어 있는지, 그런 나라가 있었는지도 모르는 동북아시아의 작고 힘없는 나라 “KOREA”가 스포츠 선진국이나 할 수 있다는 올림픽을 유치하다니…
70년대 말 우리나라 스포츠 경기력만 해도 북한은 반드시 이기고 일본에는 조금만 지자가 정도가 목표인 수준이었다. 당시만 해도 소수 종목에 정예하고 여자가 남자보다 잘했다. 한국 스포츠는 올림픽은 꿈도 못 꾸고 아시안게임이나 치렀으면 하고 30년 만에 금메달 하나 따는 것이 소원이었다.
스포츠 외교는 정부 외교와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반면 흉금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신뢰와 친화력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스포츠 외교력이 쌓아지는 것이 아니다. 많이 만나고 많이 얘기하고 상대방 문화를 이해하고 이슈에 대한 철저한 준비로 서로가 윈윈(Win-win)을 도출하는 것이 외교 교섭이고 스포츠 외교의 기본이다.
내가 대한체육회장 겸 대한올림픽위원장에 취임한 이래 언론들은 “동방불패”라는 별명을 붙였다. 국제회의나 국제대회 유치에 나서기만 하면 반드시 이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방불패의 신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아마 시작은 74년 멕시코의 마리오 바스케즈와 스위스 베른에서 78년 세계사격대회를 놓고 격돌했을 때 일일 숙박 및 식대(Room & Board)를 10불이라고 해 나는 5불로 맞서 62 대 40이란 표로 이긴 일이었던 것 같다. 세계사격대회는 우리 나라가 개최한 유일한 올림픽 종목의 세계선수권대회로 바덴바덴에서 올림픽을 유치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영국의 대기자 데이비드 밀러는 그의 저서 ‘올림픽 혁명’에서 “세계사격대회 유치가 아시아의 지정학적 위치를 바꾸어 놓았다”고 서술했다.
대한체육회장에 취임한 이후 많은 것을 고민했다. 그중에 가장 시급한 문제 중 하나가 ’88서울 올림픽을 어느 대회보다 성공적으로 치러냈지만 그 이후 성공올림픽에 대한 반대급부를 얻어내지 못했다. 최고의 기회를 맞았지만 우린 너무 쉽게 그 기회를 놓쳐 버린 것이다. 한국전쟁에 신음하고 가난에 허덕이던 한국이 경제적으로 급성장하여 올림픽까지 치를만한 비전과 꿈이 있는 나라라는 것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렇게 큰 세계적인 이벤트를 치러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엄청나게 많은 시너지 효과를 얻어내는 데는 소홀히 한 것이다.
내가 대한체육회장을 맡았던 시점은 ’88올림픽이 끝나고 5년의 세월이 지난 때였다. 서서히 그 열기가 식어갈 무렵, 그나마 희미하게 남아있는 불씨를 어떻게 살리는가? 그것이 나에게 준 과제였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꿈이 외교관이었고 청년시절에는 외교의 일선에서 뛰었다. 내각 수반 겸 외무장관 의전비서관, UN대표부, 주미대사관, 주영대사관, 참사관, 유엔총회 대표 등으로 있으면서 많은 친구를 사귀었고 국제감각을 익혔다. 스포츠 외교 역시 ’71년 대한태권도협회를 취임하면서 국제화를 먼저 생각했고 숨 가쁘게 세계태권도연맹,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를 창설한 것도 세계화를 이룩하지 않으면 결국은 도태된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계에 무도는 수백 개가 존재하지만 세계가 받아주는 무도는 몇 개나 되나.
스포츠는 생물이다. 계속해서 움직이고 진화해야 발전이 있다는 뜻이다. ’88서울 올림픽의 성과를 이어가기 위해, 한국스포츠가 진화하고 발전해서 우물 안 개구리에서 세계를 보기 위해 대회 유치와 각종 국제스포츠 이벤트를 한국으로 이끌었다.
70년대 초부터 태권도 세계화에 앞장서면서 나는 세계스포츠계에 많은 친구들을 갖고 있었다. KOC부위원장 겸 명예총무로 4년 또한 10여년을 연임해 온 GAISF 회장, ’86년도에 피선된 IOC 위원은 더 많은 인연과 경험을 쌓게 해주었다. 또 서울올림픽이 IOC 코디네이션 위원회가 위원회가 없을 때 열려 내가 직접 IOC와 모든 교섭을 했던 경험도 도움이 되었다.
IOC 내에서도 빠른 속도로 입지를 굳혀 나갔다. 오직 올림픽운동의 보급과 확산에 주력해 온 나에게 IOC는 86년에 GAISF 회장, ’88년에 집행위원, IOC TV 분과위원장, ’92년 바르셀로나 총회에서 부위원장의 중책을 맡겼다. 물론 선거를 통해서였다. 이런 위치에 있었던 탓에 ’93년 대한체육회장 겸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에 피선되자 세계 스포츠인들의 한국에 대한 관심이 급상승했다. 세계스포츠 강국들이 앞을 다퉈 스포츠 협력 협정을 맺고자 했으며 상호 교환 전지훈련 등의 제의가 쇄도했다. 또한 후진국 NOC의 지원 요청도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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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AISF 서울총회에서 사마란치위원장과 (19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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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모든 분위기가 한국 스포츠의 중흥에 상당한 힘을 실었다. 사실 IOC 위원이란 자리는 IOC를 대표해서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에 올림픽운동을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한국을 대표하는 IOC 위원은 아니다. 그러나 조국의 스포츠 발전을 마음 깊이 심어두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닐까. 더구나 나는 대한체육회장,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도 맡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계획한 것이 한국 스포츠를 세계 속으로 뛰어들게 하는 것이었다. ’95년 아시아 스포츠의 중심인 OCA 총회를 서울에서 개최토록 유치권을 따냈고, 그 OCA 총회에서 부산아시안게임 유치를 이뤄냈다. 이어 그해 말 국제경기연맹의 총 집합체인 GAISF 총회도 한국에서 개최했다. ’96년에는 IOC 세계생활체육총회를 한국에서 개최함으로서 ’88서울 올림픽 이후 잊혀져가던 한국스포츠의 세계적 위상을 끌어올리면서 세계 스포츠인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런 모든 국제스포츠 회의의 유치권은 투표로 결정되는데 그때마다 압도적인 표차로 상대방을 제압했다. 동방불패 신화의 시작이었다. 한 외국 스포츠계 인사는 한국이 모든 국제스포츠 행사를 독식하는 것이 아니냐, 다른 나라에게도 기회를 줘야지 라는 농담 섞인 푸념도 할 정도였다.
그렇게 이어진 세계 스포츠 행사의 유치는 ’98년 서울올림픽 10주년 기념행사에 맞춘 IOC 집행위원회 유치와 ’99년 IOC 총회 유치로 피크를 이뤘다. 세계 스포츠를 총괄하는 IOC 총회와 집행위원회의 유치와 성공적 개최는 이제 한국을 명실상부한 아시아 스포츠의 리더이며 세계 스포츠의 메카로 자리 잡게 하는 디딤돌이 되었다. 또한 전 세계 스포츠인에게 한국의 이미지를 깊이 각인시키며 그 이후로 계속된 각종 국제스포츠 행사에 기득권을 갖게 되는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98년 ’88서울 올림픽 10주년 행사에는 40여 명의 IOC 위원이 찾아와 10주년 기념을 축하해 주었다. 이는 한국 스포츠의 힘이 놀랍게 커진 것을 의미했다. 또 대한체육회 창립 74주년과 KOC 창립 50주년 행사에는 사마란치 IOC 위원장을 비롯한 IOC 위원들이 대거 참가하고 태릉국가대표선수촌도 방문했다. 나는 방한했던 많은 IOC위원들을 국기원으로 초빙해 태권도 시범을 보여줬고, 그 기억들은 이후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 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국제대회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아시안 게임과 유니버시아드대회 유치에 나섰다. ’97년 무주-전주에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를 유치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동계종합대회를 개최했으며 2001년에는 대구에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를 유치했다. 아시안 게임으로는 ’99년 강원 용평 동계아시안 게임, 그리고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을 유치함으로써 동하계 아시안 게임 유치의 꿈을 이룩했다. 물론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 전초전인 ’97년 부산동아시아 경기대회도 재임 중에 유치한 대회 중 하나다.
2002년 월드컵 한일 공동개최 때 일이다. 우린 일본보다 유치전에 늦게 뛰어들어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초기 우리가 분석한 자료로는 일본을 이긴다는 게 불가능해 보였다. 축구협회는 물론이고 기업들의 상사 주재원까지 나서서 표 획득에 열을 올렸다. 나도 IOC 위원들에게 한국이 월드컵을 유치할 수 있도록 그 나라 FIFA 위원들을 설득해 줄 것을 부탁하였고 페스칸테 이탈리아 IOC 위원이 FIFA 부회장을 설득해주었다. FIFA 아벨란제 회장과도 친분은 두터웠지만 아벨란제는 이미 일본 쪽에 기울어져 있는 형편이었다.
사마란치 IOC위원장이 서울에 와서 김영삼 대통령과 오찬을 했는데 김영삼 대통령은 늘 그랬듯이 월드컵 서울 개최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사마란치 위원장이 자기는 한국을 위해 한국에 30번이나 온 사람이니 당위성 설명은 필요 없고 무엇을 도와주면 되느냐 물었고 김영삼 대통령은 월드컵 유치를 부탁했다. 사마란치는 FIFA 이사들 의견이 공동개최는 가능하다는 의견인데 하벨란제가 브라질 올림픽 유치 때문에 브라질 대통령과 IOC에 올 때 설득해서 알려주겠다고 하고 돌아갔다.
사마란치로부터 2번의 설득 끝에 하벨란제가 동의해서 내일 FIFA 회의에서 발표하기로 했으니 김영삼 대통령에게 알려드리라는 전화가 왔다. 그 다음날인 6월1일 FIFA에서 한일공동개최를 발표했다. 물론 그간에 정몽준 회장, 구평 회장 등 대기업과 김영수 문체부 장관의 노력도 큰 밑거름이 되었다.
한국 스포츠를 국제스포츠 메카로 만드는 일은 숨 가쁘게 진행되었지만 성공적으로 추진되었다. 한국 스포츠가 이제 세계 스포츠의 한 축이 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