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스포츠의 국제경쟁력 제고 (3회)
  제1장 대한체육회 회장시절

현대 스포츠는 포성 없는 전쟁터나 마찬가지다. 동·서이데올로기의 대립이 붕괴된 마당이라 스포츠의 경쟁력은 곧 그 나라 국력의 상징처럼 되어 있다. 우리나라가 ’86,’88 양 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한 기반은 높은 경기력도 한몫을 차지한다. 아무리 큰 대회를 잘 치러도 그 나라 선수의 성적이 나쁘면 성공으로 보지 않는다. ’76 몬트리올 올림픽 때는 주최국인 캐나다가 은메달 2개밖에 못 따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86아시안 게임에서 사상 최초로 일본을 누르고 중국과는 금메달 동수를 이루면서 아쉽게 2위를 차지했지만 국민들에게 뜨거운 감동을 불어 넣어 주었다. ’88서울 올림픽에서는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로 종합 4위를 차지함으로써 세계스포츠 강대국을 깜짝 놀라게 하며 스포츠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런 성과가 없었다면 아마 ’86,’88 양 대회의 역사적 개최에 대한 의미는 상당히 희석될 수도 있었다.

그때의 열기를 계속 이어가기 위해서 대한체육회 회장,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의 사명감은 매우 무거웠다. 훈련장을 개선하고 선수들의 복지후생에 모든 신경을 썼지만 경기력이란 것이 하루아침에 상향되거나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90년대 초 민주화의 열기로 사회 전 분야의 요구가 봇물처럼 쏟아지는 분위기였다. 우리나라 스포츠는 민주화 열기 이전까지 상대적으로 상당히 높은 지원을 받았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와서 체육 예산이 동결되거나 감소되고 메달리스트에 대한 혜택도 줄었다. 선수들도 흔히 3D(Dirty, Difficult, Dangerous) 업종이라 불리는 운동을 외면했고 경제적 여유가 한국의 강인한 정신력의 근간인 헝그리 정신을 실종시켰다.

내가 대한체육회장을 맡은 때가 바로 그 시점이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까지는 ’88서울 올림픽의 신화를 쓴 선수들이 활약하는 시점이어서 목표했던 10위권 이내의 수성이 가능했지만 지금부터가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대교체의 시점이었던 것이다. 또 세계가 엘리트 스포츠에 투자를 시작하고, 경제 발전과 함께 스포츠의 대중화가 이뤄지고 있었다.

’88 때 뛴 선수들은 이미 노장이거나 은퇴를 했고 젊은 선수들로 바뀌었다. 올림픽에서 한 번 10위권 밖으로 벗어나면 다시 진입하기가 매우 힘들다. 전문가들은 20년이 걸린다고 말한다. 사면초가의 상태에서 내가 할 일은 세밀한 훈련 계획, 각국 정보의 면밀한 분석, 최소 예산으로 최대 효율을 기할 수 있는 적극적 지원, 젊은 선수들 동기부여 등 최선을 다했다. 나는 중국이나 일본이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더 잘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얻은 결과를 보면 하계 유니버시아드대회는 ’93년 버팔로대회에서 종합 13위, ’95년 후쿠오카대회 종합 5위, ’97년 시실리대회 종합 9위, ’99년 팔마대회 종합 11위, 2001년 베이징대회 종합 8위의 성적으로 대학생 올림픽에서는 나의 임기 동안 꾸준히 10위권 내외를 유지했다. 그럼 동계 U대회에서는 어땠을까? ’95년 하카대회 종합 2위, ’97무주-전주대회 종합 6위, 2001년 자코파네대회 종합 2위 등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우리는 ’97 무주-전주U대회와 2001년 대구 하계 U대회도 유치했고 스포츠 발전과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의 기틀이 되었다. 대구 하계 U대회 때는 북한 선수단도 참가해 붐을 일으키는 데 일조했다.

아시안 게임에서는 ’94년 히로시마대회 때 홈 어드밴티지(home advantage)를 살린 일본에게 금메달 1개 차로 밀려 3위에 그쳤지만 ’98년 방콕대회와 2002년 부산대회에서는 압도적인 차로 일본을 제치고 종합 2위를 지켰다. 히로시마와 방콕 아시안게임에서는 우리가 남녀 구기 종목에서 우승을 거의 싹쓸이했다. 동계아시아경기대회는 ’96년 하얼빈대회에서는 4위에 머물렀지만 ’99년 강원아시안 게임에서는 종합 2위로 올라서면서 동계 종목 역시 아시아 2위권 위치로 끌어올려 놓았다.

▲1994년 메달리스트의 밤 / 왼쪽부터 김미정, 현정화, 필자, 조윤정, 김기훈, 이에리사
 
U대회, 아시안 게임에서의 괄목할만한 성과를 보였지만 우리 국민의 눈높이는 이제 올림픽에 맞춰져 있었다. ’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은 대한체육회장 겸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으로서의 올림픽 첫 무대였으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는 내가 IOC부위원장으로도 있어서 한국 선수단은 어디를 가나 어깨를 필 때였다.

그러나 한국 쇼트트랙 선수들의 분발은 세계를 놀라게 하고 우리 국민들에게는 희망과 꿈을 불어넣어 주었다. 김기훈, 채지훈, 이준호 등의 남자 선수, 그리고 전이경, 원혜영, 안상미, 김소희, 김윤미 등 여자 선수들의 메달 행진은 한국을 금메달 4개,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로 종합 6위의 성적으로 이끌었고 쇼트트랙 세계최강자로 군림케 했다. 스피드스케이팅도 유선희가 500m 빙속에서 5위에 입상했다.

한국 동계스포츠가 세계의 위협이 되고 진정한 종합 10위권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90년대라 할 수 있다. 한국은 이후 꾸준히 발전해 피겨스케이팅과 스피드스케이팅, 봅슬레이, 스켈레톤에서 지금은 세계 최고의 경기력을 자랑하게 되었다. 김연아, 이상화, 이규혁도 그렇게 나온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한국 스포츠가 특히 동계종목 같은 경우는 한 종목에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느 나라든지 전략종목이 있고 강세종목이 있는 것이다. 육상 스프린터에는 백인이 없다. 수영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중에 흑인이 몇 명이 있는가. 인종별로, 민족별로 각자 잘하며 뛰어난 종목이 있다. 여기에 집중 투자하고 강화시키고 점차 종목을 늘려가는 것도 하나의 전략이다. 체질적으로 할 수 없고 불가능한 종목까지 잘해야 한다는 것은 욕심이다.
 
’98나가노 동계올림픽도 금메달 3개, 은메달 1개, 동메달 2개로 종합 9위에 올랐으나 2002 솔트레이크 올림픽에서는 금 2, 은 2개로 종합 14위로 쳐졌다.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에서는 안톤 오노의 할리우드 액션과 호주 심판의 이상한 판정에 의해서 금메달을 하나 놓치는 바람에 모든 것이 복잡해졌고 너무 아쉬웠다. 이 때 러시아와 한국이 판정 불만으로 보이콧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자 로게 IOC위원장이 그렇지 않다는 성명을 발표해달라고 요청해왔다. 우리도 동계올림픽을 유치하려 하는 나라이니 IOC에 협조하여 IOC가 준비한 성명문을 발표했는데 무엇이 성공적인 올림픽이냐며 언론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았었다.  

솔트레이크 올림픽에서는 전이경이 선출직 IOC 선수위원으로 입후보했으나 낙선했고, 로게 IOC위원장에게 건의해 임명직 IOC 선수위원으로 선임한 것이 성과였다.

내가 대한민국체육계의 수장을 맡고 나서 맞이한 첫 하계올림픽대회는 애틀랜타 올림픽이었다. 40도가 넘는 폭염 속에 우리 선수들은 잘 뛰어 주었다. 금 7개, 은 15개, 동 5개를 조국에 바쳤다. 메달 획득 총수 종합 8위, 걱정했던 것보다는 정말 잘 뛰어 주었다. 또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는 이건희, 장웅 위원을 나란히 IOC위원에 선임시켰다.

다음 2000년 시드니 올림픽, 10위권 이내의 위상을 확립해 온 한국스포츠에 경종을 울린 대회였다. 선수들은 열심히 뛰었다. 그러나 세대교체의 흔적이 역력했다. 국민들의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쏠리면서 올림픽의 열기도 많이 사라졌다. 그런 와중에서도 선수들은 열심히 뛰었지만 마지막 벽을 넘지 못하고 은메달이 많았다. 금 8, 은 10, 동 10개 종합 12위(메달 수로 9위)를 차지하는데 그쳤지만 세대교체가 절반은 성공해 있음을 보여준 대회였다. 또한 언제든지 10위권에 재진입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준 대회라고 생각한다. 시드니 올림픽에 갔다 와서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리셉션을 열어주었는데 나보고 양궁과 태권도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말한 것이 기억난다.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태권도가 처음 정식종목으로 경기를 운영해 세계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또 50년 만에 남북선수단이 개회식에서 세계의 갈채를 받는 가운데 동시 입장을 하는 역사도 이루어냈다. 이 무렵 나는 KOC위원장이라는 책임 외에 IOC집행위원, 세계태권도연맹 총재, IOC TV위원장으로 여러 가지 책임을 병행하고 있었다.

재임기간동안 한국스포츠의 국제경쟁력은 과도기에 있었다. 전국체육대회 못지않은 규모로 치러졌던 소년체전이 축소되거나 폐지된 해를 거친 세대가 새 국가대표로 자리를 잡았다. 국민들의 관심이 프로로 쏠렸던 시대에 아마추어 선수들이 제대로 방향을 설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던 시기였다.
 
IMF로 인해 대기업이 스포츠 지원에서 손을 떼고 실업팀은 많이 폐지되었다. 나는 매일 대기업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실업팀 해체를 하지 않도록 매달려야 했다. 그러면서도 선수촌, 한국체대, 국군체육부대 이 셋만 있으면 엘리트 체육은 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임했다. 

체육이 하나의 사치로 치부되고 지원의 우선순위가 한참 뒤로 밀렸던 시절에도, 스포츠는 국민들에게 꿈과 용기를 불어넣기 위해 뛰었다. 국제경쟁력의 연착륙, 그것은 다음 세대 한국스포츠가 다시 세계를 향해 힘차게 도약시킬 차선의 선택이었다.

 
  훈련환경의 대대적 개선과 획기적인 선수복지후생의 전환 (2회)
  한국을 세계 스포츠의 메카로 (4회)
  |91||9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