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7월에 서울대학교대학원(大學校大學院) 교무과장(敎務課長)으로 임명되어 1970년 4월 의대학장(醫大學長)으로 취임(就任)할 때까지 근무하였다. 20개월 동안에 네 분의 원장을 모셨다. 임명되었을 때 원장(院長)은 철학자이신 박종홍(朴鍾鴻) 선생이었는데 정년(停年)을 몇 개월 앞에 두고 계셨다. 선생의 심오(深奧)한 학문과 고매한 인격은 누구나 잘 알고 있었는데 직접 모신 짧은 기간 중에도 이러한 점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최문환(崔文煥) 총장으로부터 임명장을 받고 박원장(朴院長)에게 신고하러 갔다. 그때 주신 말씀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젊은 사람의 시간(時間)을 빼앗게 되어서 미안합니다. 젊었을 때에 힘껏 연구를 해야 하는 것인데 교무과장(敎務課長)일 때문에 연구할 시간이 제약을 받게 되는 것이 안타깝소. 결재서류에는 내가 선결(先決)을 할 터이니 1주일(週日)에 한두 번 사무실에 나와서 후결(後決)하도록 하십시오. 그래야 시간이 절약됩니다."
참으로 뜻이 담긴 말씀이다. 진실로 학문하는 분이 아니고서는 말할 수 없는 이야기다. 행정상(行政上)으로는 물론 말이 안 된다. 상사(上司)가 선결(先決)하고 밑에 있는 사람이 후결(後決)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전부터 선생에 대하여는 경의를 표해오던 입장이었는데 이 말씀을 들은 후부터는 선생에 대한 경의가 더욱 돈독해졌다.
두 번째로 모신 원장(院長)은 이인기(李寅基) 선생이었다. 구김살 없으신 교육학자이셨다. 행정(行政)에도 밝으신 분이었다. 숙명여대총장(淑明女大總長)으로 가시게 되기까지 6개월 간을 모셨는데 국민교육헌장(國民敎育憲章)을 작성하는 대임(大任)을 맡으신 까닭에 상당한 기간을 우이동(牛耳洞)에 위치한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보내셨다.
'아카데미 하우스'에 결재서류(決裁書類)를 가지고 가서 결재를 받는 것이 상례였다. 요사이도 국민교육헌장(國民敎育憲章)이 낭독(朗讀)될 때마다 선생님 생각이 떠오른다. 만년에 전립선(前立線) 때문에 입원하셨는데 문병(問病)을 갔더니 옛이야기를 잊지 않고 계셨다.
세 번째로는 철학자이신 김계숙(金桂淑) 선생을 모시게 되었다. 1년 수개월 간 모셨는데 그 동안에 많은 것을 배웠다. 학자로서의 선생님에 관하여는 사족을 붙일 필요가 없다. 학문하는 어른으로서는 지극히 명랑한 분이시다. 식도락(食道樂)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음식에 관해서 조예가 깊으셨고 다방(茶房)에 관하여도 발군(拔群)의 지식을 가지고 계셨다.
선생님을 모시는 동안에 여러 차례 다방(茶房)에도 갔었다. 다방가(茶房街)에서는 '미스 김(金)'이라는 별명으로 통한다. '계숙(桂淑)'이라는 이름에 연유한 것이리라 믿는다. 일인무언극(一人無言劇)을 보여주는 다방이 있는 것도 처음으로 알았다. 예술적으로 분석해서 설명해 주시는 선생님이 더욱 위대하게 보였다.
선생(先生)덱에 가서 폐도 많이 끼쳐 드렸다. 대학(大學)교수이시던 사모(師母)님의 내조(內助)의 공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사모님을 잃으신 후의 선생(先生)님 모습이 몹시 야위어 보이신 것이 연령(年齡)의 탓만은 아닌 줄로 안다.
1987년 7월에 말레이시아의 콸라룸푸르를 방문했을 때 서랑인 최일성(崔一成)씨의 환대를 받은 일이 있다. 현대종합상사(現代綜合商社)의 콸라룸푸르 지점장(支店長)이었는데 지금은 캐나다로 자리를 옮긴 것으로 알고 있다. 선생(先生)님에 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온 것은 당연하다. 귀국 후 선생을 뵈었을 때 서랑님 말씀을 올렸더니 무던히 기뻐하시던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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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굴암에서 박찬무 형, 이성무 형, 이 형의 종형 내외와 함께(19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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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로는 민병태(閔丙台) 선생을 모시게 되었다. 정치학자(政治學者)인 선생으로부터도 배운 것이 많았는데 내 자신이 의대학장(醫大學長)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어 모신 기간이 짧았던 것이 유감이다.
지금은 네 어른이 모두 고인(故人)이 되셨다. 대학원(大學院) 교무과장(敎務課長_때 모신 선생님들이 훌륭하고도 특색이 있는 어른들이었기에 그 당시의 일들이 생생(生生)하게 기억된다. 대학원(大學院) 교무과장직(敎務課長職)을 맡고 있는 동안에는 어느 교수(敎授)가 어떤 연구를 하고 있는지, 학문의 추세가 어떠한지에 관하여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한편 많은 교수(敎授)들과 접촉할 수 있는 빈도가 늘기도 하였다.
교무과장직(敎務課長職)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잊혀지지 않는 '에피소드'도 있다. 한 예(例)로 대선배이신 K선생(先生)의 경우가 회상된다. 학위심사(學位審査)가 몇 차례에 걸쳐서 실시되는데 최종심사(最終審査), 즉 결심시(結審時)에는 교무과장이 배석하게 되어 있다. 박사학위의 경우에는 심사위원회(審査委員會)가 위원장(委員長)을 포함해서 5인(人)으로 구성된다. 결심에서는 구두시험이 있고 그 결과를 점수화(點數化)하여 제출하게 되어 있다. 교무과장(敎務課長)은 제출된 점수를 합산해서 평균점수를 산출하고 합격 여부를 심사위원(審査委員)에게 공표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김계숙(金桂淑) 선생을 원장으로 모시고 있던 초기(初期)였다. K선생(先生)의 결심위원회(結審委員會)에 배석하였다. 이 선배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일은 있었지만 직접 뵙게 된 것은 처음이다. C교수(敎授)께서 심사위원장(審査委員長)이시고 위원(委員) 4명(名) 중 2명(名)은 비교적 젊은 교수였다.
구두시험이 시작되었는데 K선생(先生)에 대한 공격이 대단하다. 의학(醫學)분야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공격(攻擊)과 비판(批判)이 계속되었다. 아무리 따져보아도 표결에 붙이면 가(可)2 부(否)3이란 결과밖에 나올 수 없는 분위기여서 통과는 절망적이라고 믿어졌다.
나 자신과는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처지였지만 K선생이 측은하게 보였다. 사학(史學)분야였었기 때문에 학문상으로는 전연 아는 바가 없었지만 노 선배에 대하여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K선생은 나의 모교인 경기고등학교(京畿高等學校)의 교장직(校長職)을 역임(歷任)하신 분이라고 듣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방법을 써서든지 이 선배님을 도와 드리는 것이 도리라고 판단되었다. 궁리 끝에 결심(結審)을 연기해서 다시 한 번 기회를 갖는 것이 좋겠다고 위원장(委員長)에게 건의했더니 현명한 안이라고 하시면서 건의를 받아 들이셨다.
약 2개월 후에 다시 결심위원회(結審委員會)가 열렸다. 논문 중에서 시정해 오라고 했던 부분이 그대로 있다고 지적하는 위원도 계시고 성의가 없다고 비난하는 분도 계셨다. 다시 결심을 연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실상 결심을 연장하는 예는 없는 것이며, 어느 의미에서는 연장조치(延長措置)가 교무과장으로서는 월권행위였는데 대선배의 입장을 생각해서 월권을 감행했던 것이다.
구두시험의 결과를 합산하여 평균을 내보니 합격선 미달이다. 위원 한 분이 영점(零點)을 준 것이다. 평균점수가 합격선에 미달되니 통과가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선포하였다.
교무과장직(敎務課長職)을 물러나고 의학대학장(醫學大學長)으로서 근무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법원(法院)에서 증인(證人)으로 출두하라는 시달을 받았다. K선생께서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난생 처음으로 법원에 출두하였다. 출두하기 전까지는 법원에 가면 판사가 커피라도 주면서 알고 싶은 것을 물어보지 않겠는가하고 기대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막상 출두해보니 전연 예상과는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복도에 있는 길다란 나무의자에서 대기하게 되었고 공판정(公判廷)으로 들어오라고 해서 들어가 보니 서명날인한 서약서를 낭독하라는 명령이었다. 위증(僞證)을 하면 응분의 형벌을 받는다는 내용이었다.
이윽고 증인신문(證人訊問)이 시작되었다. 알고 있는 대로 답변하였다. 이 재판에서는 대학 측이 승소하였다. 그 후 대법원(大法院)으로 이관(移管)되었는데 여기서는 원심파기(原審破棄)의 판정이 내려 원고 측의 승소로 끝났다. 학위증(學位證)은 당시 대학원장(大學院長)이시던 한우근(韓㳓劤) 선생께서 전달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일도 있었다. 1969년 5월 28일, Nguyen Van Thieu 베트남 대통령에 대한 명예법학박사 수여식이 있었다. 이를 준비하기 위한 모임이 몇 차례 있었는데 문제는 월남어(越南語)를 구사하는 인사를 구하기 어려운 점이었다. 하는 수 없이 주한 월남(越南)대사관에 연락하여 협조를 얻기로 하였다. 영어로 번역한 학위 추천서를 건네주고 월남어(越南語)로 통역하도록 하였다.
하루는 김계숙(金桂淑) 원장을 모신 자리에서 리허설을 하였다. 통역하는 중에서 몇 차례 '똥통'이란 말이 나온다. 나는 이것을 뺄 수 없느냐고 물었더니 월남(越南) 대사관원은 제일 중요한 단어인데 어떻게 뺄 수 있느냐고 말한다. '똥통'은 총통(總統) 즉 대통령(大統領)인 것이다. 그렇다면 발음이라도 약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청중들 사이에서 웃음이라도 터지면 어쩌나 하고 근심했던 까닭이다.
